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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1204
성명
한자 朴永煥
이명 宇月堂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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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5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18.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서문(西門) 부근에서 범어사(梵魚寺) 부속 명정학교(明正學校)지방학림(地方學林)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운동을 일으켜 남문(南門)까지 행진을 전개하였으며 동월 19일 아침 동면 시장통에서 재차 벌어진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것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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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3월 경남 동래군(현 부산 동래) 범어사(梵魚寺) 승려 김영규(金永奎)는 같은 승려인 차상명(車相明)·김봉환(金奉煥) 등과 함께 다른 지방에 호응하여 범어사 부속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지방학림(地方學林)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7일 저녁, 범어사 내에서 양교의 졸업생 송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영규는 축사를 한 다음 독립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졸업생들에게 동래로 나가 만세운동을 펼치도록 권유하였다. 일동은 그 취지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저녁식사를 한 다음 어둠을 틈타 동래로 잠입하였다.

범어사 승려였던 박영환은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여 3월 18일 밤 양교 학생 수십 명을 중심으로 시위대를 형성하여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서문 부근에서부터 만세시위를 시작, 동래시장을 통과하여 남문까지 행진하였다. 이들은 이튿날에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3월 19일 정오경, 이들은 다시 동래경찰서 부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제지로 주동 학생들이 체포되자, 오후 6시경 재집결하여 동래시장 남문 부근에서 대열을 갖추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래경찰서로 행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204∼12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86∼188면
  • 釜山·慶南 三一運動史(社團法人 三一同志會, 1979) 47∼51면
  • 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19. 5. 2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영환 법명(法名) : 우월당(宇月堂) 경남 부산 명정학교
본문
1896년 4월 18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북면(北面) 남산리(南山里, 현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법명(法名)은 우월당(宇月堂)이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날 무렵에는 범어사 부속 명정학교(明正學校)의 학승이었다. 1919년 3월 18일 동래면 서문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고, 다음날 동래시장 시위에도 적극 참여하였다.1919년 3월 4일 범어사 출신의 김법린(金法麟)·김상헌(金祥憲) 등에 의해 범어사 내 청련암(靑蓮庵)으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이후 범어사 내의 승려와 지방학림(地方學林), 명정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3월 17일 저녁 청련암에서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졸업생 송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모인 약 40여 명의 범어사 승려와 학승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이미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1,000여 장씩 준비되어 있었다.송별회가 끝난 후 동래읍으로 향하였다.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동래포교당에 도착한 것은 18일 새벽 1시 무렵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일본 경찰 20여 명이 들이닥쳐 김영규(金永奎)·김한기(金漢琦) 등 주도자 4명을 끌고가고 나머지는 강제로 해산시켰다. 시위 계획이 실패로 끝났음을 감지하고 동래에서 범어사로 귀가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명정학교 학생을 만나 다시 동래로 돌아갔다. 그리고 18일 밤, 40여 명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동래읍 서문 부근에 모여 시위를 시작하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동래시장을 지나 남문까지 행진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어서 그날 밤 비밀 모임을 갖고 3월 19일에는 더욱더 대규모로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19일 오후 5시경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다시 동래시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1919년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과 같은 형량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5-2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동래장터 3.1운동만세 시위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2 비석 3·1운동 유공비 부산광역시 금정구
3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부산광역시 동래구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5 비석 3·1운동 유공비 부산광역시 금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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