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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693
성명
한자 金相琦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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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17 동래군(東萊郡) 범어사(梵魚寺)에서 학생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배포하는 등 독립만세를 주동계획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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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범어사(梵魚寺) 학생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범어사에는 국민학교 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있었는데, 그는 지방학림 학생이었다.

서울에서의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있던 2월 하순경, 불교계의 민족대표인 한용운(韓龍雲)이 이곳에 내려와서, 주지 오성월(吳星月) 및 이담해(李湛海)·오이산(吳梨山) 등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상경하였다. 그후 그는 이들과 만나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하여 전해듣고 범어사에서도 학생을 중심으로 3월 18일의 동래읍(東萊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허영호(許永鎬)등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7일 오후, 범어사 경내에서는 4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졸업생 송별회가 벌어졌는데, 이때 승려인 김영규(金永奎)는 축사를 한 후 이들에게 이튿날로 계획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마침 지난 3월 13일의 동래 장날에 동래고보(東萊高普)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있은 직후라서 학생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영규의 선창으로 4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야음을 틈타 동래읍으로 향하였다.

범어사를 출발한 그는 일제에 발각되지 않기 위하여 대로를 필하고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학교 뒷산을 넘어 새벽 1시경 동래읍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불교 포교당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던 그는 밀고를 받아 이곳을 기습한 20여명의 일본군경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62·2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87·188·1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04∼120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상기 - 경상남도 양산(梁山) 3.1운동
본문
1894년 7월 28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현 양산시) 동면(東面) 사송리(沙松里)에서 태어났다. 경남 동래군 범어사(梵魚寺)에서 중등학교 과정으로 운영한 지방학림(地方學林)에 입학하였다. 1919년 지방학림 학생으로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월경 불교계 대표로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한용운(韓龍雲)이 범어사를 방문해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던 준비 소식을 전하며 여기에 동참해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김법린(金法麟) 등 6명과 함께 범어사 대표로 상경해 3월 1일 서울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 등의 문건을 가지고 돌아와서 범어사 부속 지방학림과 명정학교(明正學校) 학생들을 규합해 동래군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3월 17일 범어사 승려 차상명(車相明)·김봉환(金奉煥)·안경환(安敬煥)·김영규(金永奎), 명정학교 학생 김한기(金漢琦) 등과 함께 명정학교에 모였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만세 운동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보고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을 모아 읍내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날 밤 두 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연회를 열고 시위 참여를 권유하기로 했는데, 김한기와 함께 각각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유력자를 만나 이에 대한 승인을 얻고 학생들을 규합해나갔다. 그날 밤 열린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졸업생 송별회에는 약 30~40명의 학생이 참석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 김봉환 등 4명과 함께 연설자로 나서, 전국의 만세 시위 현황을 설명하고 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는 이튿날인 18일 동래시장 인근 불교포교당에 집결해 대기하고 있다가 장터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8일 새벽 김한기 등과 함께 불교포교당에 모여 시위를 준비하고 있는데, 사전에 정보를 탐지한 일제 경찰과 헌병들이 들이닥쳐 김한기·차상명·김영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한 후 범어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고, 1940년 범어사 주지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형사제1부 1919-05-2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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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멸실 묘소가 재난 등에 의해 사라진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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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동래장터 3.1운동만세 시위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2 양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양산시
3 비석 3·1운동 유공비 부산광역시 금정구
4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부산광역시 동래구
5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6 비석 3·1운동 유공비 부산광역시 금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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