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범어사(梵魚寺) 학생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범어사에는 국민학교 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있었는데, 그는 지방학림 학생이었다.
서울에서의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있던 2월 하순경, 불교계의 민족대표인 한용운(韓龍雲)이 이곳에 내려와서, 주지 오성월(吳星月) 및 이담해(李湛海)·오이산(吳梨山) 등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상경하였다. 그후 그는 이들과 만나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하여 전해듣고 범어사에서도 학생을 중심으로 3월 18일의 동래읍(東萊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허영호(許永鎬)등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7일 오후, 범어사 경내에서는 4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졸업생 송별회가 벌어졌는데, 이때 승려인 김영규(金永奎)는 축사를 한 후 이들에게 이튿날로 계획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마침 지난 3월 13일의 동래 장날에 동래고보(東萊高普)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있은 직후라서 학생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영규의 선창으로 4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뒤, 야음을 틈타 동래읍으로 향하였다.
범어사를 출발한 그는 일제에 발각되지 않기 위하여 대로를 필하고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학교 뒷산을 넘어 새벽 1시경 동래읍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불교 포교당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던 그는 밀고를 받아 이곳을 기습한 20여명의 일본군경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62·2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87·188·1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04∼12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