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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9266
성명
한자 金思國
이명 金恩國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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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2 훈격 애족장
1910년 만주(滿洲)와 시베리아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였고, 1919년 서울에서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출옥(出獄) 후에는 노동운동(勞動運動)을 하였으며, 1921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편집부(編輯部) 위원(委員)으로 피임되어 동년(同年) 9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연합회 대표로한국의 독립을 요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1922년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를 조직활동하다가 1923년 노령(露領)을 거쳐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동양학원(東洋學院)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구국 교육 운동(救國敎育運動)에 전념하였으며, 이후 소련으로 가서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24. 10월 귀국하여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을 결성하고 책임비서를 역임한 사실(事實)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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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 출옥(出獄) :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석방되어 나옴.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1919년 귀국하여 '국민대회'에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 등과 함께 3월 중순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면서 각 방면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대표자들이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정부수립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4월 19일 그의 집에서 안상덕(安商德)·현석칠(玄錫七)·김유인(金裕寅) 등이 회합을 갖고 자금을 모집해 서울 보신각 일대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 후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4월 5일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집행위원으로 피선되는 동시에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4월 9일에는 박사직(朴思稷)·김병규(金秉圭)·김종범(金鍾範) 등과 '조선교육개선회'를 조직하였다. 동년 9월에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흑도회(黑濤會) 결성을 주도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1922년 1월 귀국하여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를 조직하였다. 무산자동지회는 '동일한 사회운동에 뜻을 두는 사람만이 회합하여 무산자계급의 생존권을 확립한다'는 목적 아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그는 1922년 11월 '신생활' 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간도에서 동양학원(東洋學院), 영고탑(寧古塔)에서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다시 소련으로 망명해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4년 귀국하여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의 결성을 주도하고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378面
  • 東亞日報(1921. 4. 9, 1922. 11. 26, 1923. 7. 7, 1925. 10. 20, 1926. 5. 10)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488·565·566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김준엽, 김창순) 第2卷 31∼33·42·44·66·67·70∼79·108·112·113·136·137·216·229·242·249·257·309·313·371·390∼392·408·412·436∼440面
  • 豫審終結決定書(京城地方法院, 1919. 8. 30)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12. 19)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67·79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14·118·144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33∼14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96, 664∼66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95·99·114·99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2輯 685∼989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사국 해광(解光) 충청남도 연산 국민대회사건, 동양학원사건
본문
1895년 11월 9일 충청남도 연산(連山, 현 논산시) 출신으로 아버지 김경수(金慶秀)와 어머니 순흥(順興) 안씨 안국당(安國堂)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해광(解光)·해강(海岡) 등이다. 가족으로는 여섯 살 아래인 동생 김사민(金思民), 아내 박원희(朴元熙)와 유일한 혈육으로 딸 김사건(金史建) 등이다.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동생 김사민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07년 서울에 올라와 보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908년 일본에 건너가 피혁회사 등에 다니며 고학하다가 1908년 4월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의 친목 및 학술단체인 대한학회(大韓學會)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1월 도쿄 유학생들의 연합 단체인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가입하여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즈음하여 만주로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하여 1914년 관립 한성중학교(漢城中學校)를 졸업하고 함남 덕원의 당우(堂隅)소학교 교사로서 재직하였다. 1915~1918년 중국에 건너가서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육영학교에서 수학하고 개원(開原) 농장에서 농업 견습 등을 하면서 민족 독립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 서울에 들어와서 한성 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국민대회’를 준비하다가 1919년 4월 23일 ‘국민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920년 9월 6일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조선노동대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2월 5일 석방되었다. 3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 창간호에 「사회생활을 대상으로 한 신도덕의 수립」, 「아인생관(我人生觀)」 등을 기고하였다. 1921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과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맞서 조직된 조선교육개선회의 위원이 되었다. 조선불교청년회의 초청으로 ‘아불교개선관(我佛敎改善觀)’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5월 20일부터 6월 8일까지 조선청년회연합회 주최로 황해도 지역 순회 강연에 참가하여 「조선청년연합회의 사명」 등을 강연하였다. 『아성』 제2호에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성』 제3호에 「근대철학과 제임스」 등을 기고하였다. 1921년 7월 평생의 동지인 박원희와 결혼하였다. 곧바로 평양에서 열린 경성고학생갈돕회 순회 강연단에 참여하여 ‘실력론의 오해’로 강연하였다. 10월 도쿄로 건너가서 『5·1신보』 발기에 참가하였다. 이어 도쿄 미나미센주(南千住) 교외에서 김사민(金思民)·박상훈(朴尙薰)·임봉순(任鳳淳) 등과 사회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0월 17일에는 도쿄 중앙청년회관에서 반도고학생 친목회 주최로 「현대적 경제조직의 결함」을 강연하고 11월 흑도회(黑濤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에 참여하고, 2월 김약수 등 12인과 ‘동우회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종로청년회관에서 열린 잡지 『학생계』 속간 기념강연회에서 「학생에게 소(訴)하노라」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4월에는 인쇄직공친목회 주최로 천도교회당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노동운동의 의의」로 강연하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에 관련된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 간부이며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청년회연합회 간부인 최팔용·오상근·장덕수 등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간부 재선출을 요구하며 서울청년회 등 19개 단체는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탈퇴하였다. 6월에는 사회혁명당을 해산하고 조선공산당(일명 ‘중립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2년 8월 니가타현(新潟縣) 한국인 학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하여 9월 천도교회관에서 진상조사를 보고하였다. 조선노동대회 주최 강연회에서 「민족적 단결과 계급적 단결」을 주제로 강연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중지되었다. 10월에는 이영(李英)·김영만(金榮萬)·임봉순 등 15명과 서울청년회 내부 ‘공산주의그룹’을 창립하고 이어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에 참여하였다. 11월 22일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하자 만주로 건너갔다. 1923년 2월 20일 창립된 고려공산동맹의 승인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되어 이젤손 등을 만났으나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3월에는 간도 룽징(龍井)에서 김정기(金正琪)·방한민(方漢旻) 등과 사회주의 교육기관으로 대성중학교 부설로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였다. 7월 일제의 ‘동양학원탄압사건’ 때 방한민과 부인 박원희 등은 검거되어 간도 일본제국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박원희는 풀려났으나 자신은 도피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되었다. 이어 닝구타(寧古塔)로 가서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는 등 사회주의 선전과 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1924년 1월 중동선(中東線) 지역 담당 청년총국에서 활동하면서 청년총국대회에 참가하였다. 5월에는 폐병이 걸린 몸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조선공산당 조직을 위한 ‘13인회’에 참여하였다. 12월 6일 창립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1월 북풍회·화요회·신흥청년동맹을 방문하여 ‘전조선사회주의운동자대회’의 개최를 제창하였다. 1925년 3월 서울청년회를 비롯한 11개 단체 23명으로 ‘재경조선해방운동자단체 연합간친회’에서 화요회 등이 주도하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부당성을 제기하였다. 4월에는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과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고려공산동맹대회에서 이영·정백 등과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29일에는 유일한 혈육인 딸 김사건이 태어났다. 이후 폐병이 악화되어 활동을 중단했으나 1926년 5월 8일 종로구 가회동 북악청년회관에서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우회(正友會)·전진회(前進會)·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조선청년총동맹·조선형평사 등 40여 단체의 조선사회운동단체연합 장의위원회가 만들어져 사회운동연합장으로 500~600여 명이 참석하여 훈련원광장에서 영결식이 치러졌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수철리(水鐵里) 공동묘지였으나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2002년 국가보훈처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후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한편 1927년 7월 경북 김천(金泉)의 금릉청년회(金陵靑年會)는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해강(海岡) 김사국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종전의 간이도서실을 ‘해강도서관(海岡圖書館)’으로 다시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1928년 1월 부인 박원희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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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2년,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2-19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1년 6월(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미결구류일수중 18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20-03-05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1년6월 경성복심법원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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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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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소 보신각 3·1독립운동 기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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