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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507
성명
한자 朴成祿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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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23 천도교측(天道敎側)김창의(金昌義) 이은규(李殷奎)등과 화천읍(華川邑) 장날에 거사(擧事)하기로 결정(決定)하여 인근(隣近) 각리(各里)연락(連絡)하고 당일(當日) 모인 100여명(餘名)시위(示威) 군중(群衆)과 함께 대한독립기(大韓獨立旗)를 앞세우고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화천읍(華川邑)으로 행진(行進) 시위(示威)하다 일 헌병(日憲兵)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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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강원도 화천(華川) 사람이다.

화천면의 3·1독립운동은 천도교인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화천면 신읍리(新邑里)의 천도교인 김창의(金昌義)가 주동인물이었다.

그는 김창의를 중심으로 이은규(李殷奎)·강석대(姜石大)·김한식(金漢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계획을 결의하여 3월 23일 화천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하남면 논미리(河南面 論味里) 와 구운리(九雲里)·상서면 노동리(上書面 蘆洞里), 그리고 화천면 풍산리(豊山里)에도 연락하여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거사 전날 밤 풍산리 주동인물이 붙잡혀 23일 장날 화천읍의 일제측 경비는 철저하게 되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신읍의 여러 마을에서는 계획대로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였고 주민들에게도 알리었다.

그는 이날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기(大韓獨立旗)'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신읍리에서 화천읍으로 시위행진하던 중 핑구고개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헌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이해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나 7월 7일 공소를 제기하여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936∼94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551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성록 박성록(朴成錄) 강원 화천 -
본문
1891년 10월 8일 강원도 양구군(楊口郡) 방산면(方山面) 금락리(琴樂里)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본적지인 화천군(華川郡) 화천면(華川面) 신읍리(新邑里)로 이주하였다. 1919년 당시 천도교인(天道敎人)으로, 화천군 화천면 신읍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신읍리 만세운동은 이 지역에 거주하며 같은 천주교도였던 김창희(金昌羲)·이은규(李殷奎)가 주도하며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1919년 3월 21일 이은규의 집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회동하였는데, 이때 연락을 받고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는 김한식(金漢植)·김용구(金容九)·김희인(金熙仁, 김창희의 장남)·김한수(金漢洙) 등도 함께 있었다. 회합에서 김창희와 이은규는 만세운동 계획을 이야기하였고, 참석자들은 주저 없이 동참을 약속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3월 23일 화천면 읍내 장날로 정해졌다.만세시위 결의 후, 준비를 위한 역할 분담이 있었다. 이은규는 아들 달용(達龍)에게 ‘조선독립국만세(朝鮮獨立國萬歲)’와 ‘화천 면민단대표자 김창희 이은규 외 1명’이라고 쓴 깃발을 만들도록 하였다.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책의 역할도 분담하였고, 신읍리 뿐만 아니라 하남면(下南面) 논미리(論味里), 상서면(上西面) 구운리(九雲里), 화천면 풍산리(豊山里) 등 인근 마을에도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그런데 거사 하루 전인 3월 22일 밤 풍산리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교인들의 활동이 일경에게 발각되면서 길호순(吉浩順)·박장록(朴章祿)·김중배(金仲培) 등 주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일경은 다음날 장이 서는 화천면 읍내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거사 당일 주도자들과 함께 지난밤의 일을 모른 채 김창희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하기 위하여 나섰다. 이들의 선두에서 ‘조선독립국만세’ 깃발을 들고, 이은규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화천면 읍내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김창희가 일러준 대로 “조선이 독립되었으니 만세를 부르러 가자”고 말하며 길가에 나와 있는 주민들에게 동참을 권유하였다. 도중에 신읍리 직동(直洞)에서 노동리(蘆洞里) 주민들을 이끌고 온 한정종(韓丁鍾)과 합세하여 화천면 읍내로 향하였다.시위대와 함께 신읍리 동지화동(東芝化洞) 고개(일명 핑구고개 또는 동지회고개)에 이르렀을 때 미리 주둔하고 있던 일제 헌병들과 마주쳤다. 헌병들의 해산 명령이 있었으나, 굴하지 않고 시위 군중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이에 일제 헌병이 달려와 깃발을 빼앗으려 하였다. 깃발을 절대로 뺏겨서는 안 된다는 김창희의 말을 상기하며 이를 지키기 위하여 몸싸움을 벌였다. 깃발을 빼앗으려는 헌병을 논 속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깃발을 지켰다. 시위 군중과 헌병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일부는 분노한 군중에게 잡혀 논바닥에 깔려 매를 맞았다.이 소식이 읍내로 전해지자 일경은 화천 헌병분견소에서 헌병과 일본군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시위 군중들 앞을 막아서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군중들과 함께 더욱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해산을 거부하였다. 군중들의 만세시위 열기가 더욱 고조되자 헌병과 수비대는 결국 발포를 감행하였고, 총소리에 군중들은 흩어져 고개 너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두에서 깃발을 들고 시위대를 이끌고 있었음으로 일본 군경의 표적이 되어 김창희·이은규 등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다.1919년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여 그 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6월 19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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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징역 2년 6월 경성지방법원 1919-05-2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소요 원판결취소, 징역 1년 6월 경성복심법원 1919-07-07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소요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20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공무집행방해 1년6월 경성복심법원 1919-07-0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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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강원도 화천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장소 3.1만세운동 기념공원 강원도 화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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