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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10월 23일 경상남도 진주군(晉州郡) 진주면(晉州面) 중안동(中安洞)에서 태어나 자랐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호는 일정(一丁)이다. 구우일(具宇一)·구춘희(具春熙)·김창환(金昌煥)·김수현(金守鉉, 또는 金守顯)이라는 가명을 썼다. 진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의령군 의령면 동동(東洞)으로 옮겨가 살면서 돗자리 판매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서울 유학 중인 누이동생 은득(銀得)이 보낸 칭병(稱病)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하여 3월 3일 도착 후 독립선언서 1부를 받아 귀향하였다. 뒤이어 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 등과 의논하고 용덕면장(龍德面長) 강재형(姜齋馨)에게 말하여 면사무소의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약 200매 등사하였으며, ‘조선 독립’, ‘정의와 인도의 문명전’ 또는 ‘결사단’이라고 쓴 큰 깃발도 여러 장 만들어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의령 장날인 3월 14일 오후 2시경, 선언서와 깃발을 장터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어서 남호섭(南灝燮) 외 3인 동지와 함께 깃발을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여, 군중 약 3,000명의 호응을 받고 시장을 누비며 읍내를 한 바퀴 돌았다. 이튿날 15일에도 향교 앞에서 시위를 재개하고 경찰서와 군청 앞에 이르러 기세를 올렸으나, 출동한 마산(馬山) 포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동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2년 형이 선고되었다.
“천운(天運)에 따라 조선인의 의무로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른 일은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항소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구주(歐洲) 대전쟁이 휴전된 이후 세계 민족자결 문제 때문에 자유가 없는 민족은 어찌 자유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병합이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는데 자유의 함성을 듣고 어찌 조선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 만세를 부를 의무를 지키는 것은 여하한 죄도 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를 내걸고 상고하였으나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형기 1년 감형으로 출옥하고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921년 7월, 주변 사람들에게 상하이(上海)에 본부를 둔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에 가입하라고 권유하였다는 혐의로 서울에서 최웅림(崔雄林)과 함께 붙잡혀 진주경찰서로 압송되고 15일간 구류 조치와 함께 취조받은 뒤 풀려났다. 1923년 2월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해 여름 상하이에서 이상일(李相一)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8월에 베이징(北京)에 가 있을 때,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찾아와 “내년 초봄에 있을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회 삼아 적기단(赤旗團)과 합작하여 국내 및 일본에서 요로대관(要路大官) 암살, 관공서 파괴 등 일대 거사를 벌일 계획(‘제3차 폭동계획’)인데 거기에 자금 3만 원이 필요하니 국내 특파원이 되어 달라”라고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12월 13일 신임장을 갖고 베이징을 떠나 펑톈(奉天, 센양)을 거쳐 1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즉시 천도교 북경교구 실장 김홍선(金弘善, 이명 김천우(金天友))이 소개해주었던 한성은행원 오세덕(吳世悳)의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安岩洞) 집을 찾아가 3일 동안 머무르며 자금 모집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일보』 펑톈지국장 신명구(申明求, 신명균(申明均)·신명주(申明珠)라고도 함)의 밀고로 12월 23일 경운동(慶雲洞)의 천도교당(天道敎堂) 앞에서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갇혔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죄목으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아 항소를 포기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두 번째 옥고를 겪었다.
1928년 2월 28일 만기 출옥하고 귀향하였다. 동년 11월 8일 하상청(河尙淸)·이종모(李鍾模) 등 6명과 함께 의령경찰서에 붙잡혀 취조받았지만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929년 12월, 하상청·이태수(李泰秀) 등과 함께 신간회 의령지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중외일보』 의령지국 기자가 되었다. 1932년 3월 21일 저녁부터 인근 가옥 세 곳에 연달아 불이 나더니 22일 아침 그의 집에도 불이 나 전소되는 변고를 겪었다.
그 후 시베리아 반제단(反帝團) 단원으로서 밀입국한 동향인 동지 김용호(金鎔浩)의 요청으로 이태수·남호섭 등 수십 명을 포섭하여 반제단 지방단부(地方團部)를 조직한 후 위원장이 되어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1944년 진주에서 고경린(高敬麟) 외 19인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 패망 후의 건국 준비를 위해 고려구국동맹회(高麗救國同盟會)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들어가 신탁통치반대위원회 및 독립촉성국민회 임원이 되어 활동하였고, 진주·진양(晋陽) 지당부(支黨部)를 설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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