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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1170
성명
한자 南進祐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5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월 경기도京畿道 안성군安城郡 양성면陽城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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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에서는 군중 1,000여 명이 원곡면사무소로 집결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주도자 중 한 사람인 이유석(李裕奭)의 제안으로 면장과 면서기를 끌어내어 함께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어 시위군중들은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가 있는 양성면(陽城面)으로 행진하였다.

양성면에서는 4월 1일 오후 9시 반경 수많은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해산하여 귀가하는 도중에 원곡방면에서 행진하여 오는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2,000여 명으로 늘어나 기세가 오른 시위대는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이 도망하자, 군중들은 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전신주를 찍어 넘어뜨리고 전선을 절단하는 한편 우편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태우고 벽에 부착되어 있던 일장기를 철거하였다. 시위군중은 계속하여 일본인 상점과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파괴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연합시위는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이 만세시위는 일제가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시위와 평북 의주군(義州郡) 옥상면(玉尙面) 시위와 함께 ‘3대 폭력시위’로 꼽을 정도로 격렬하였다.

남진우는 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2월 4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3·1운동과 安城의 4월 독립항쟁(安城文化院, 2002)
  • 安城郡 元谷·陽城의 3·1운동(이정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집, 1987)
  • 犯罪人名簿(陽城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진우 - 경기 안성(安城) 안성군 양성면, 원곡면 만세시위
본문
1899년 11월 9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현 안성시) 양성면(陽城面) 덕봉리(德峰里)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과 원곡면(元谷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경기도 안성군 양성면·원곡면의 만세시위는 각 면의 시위 군중이 합류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과격해진 사례로, 1919년 3월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원곡면민 최은식(崔殷植)·이덕순(李德順)·이근수(李根洙)·홍창섭(洪昌燮) 등이 주도하였다.거사 당일인 4월 1일 오후 8시경 원곡면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소재한 원곡면사무소(元谷面事務所) 앞에 주동자들을 비롯한 원곡면민 약 1,0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후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향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등과 횃불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에 이르러 이유필이 시위 군중에게 “오늘밤 이렇게 회집한 것은 천운이니 양성경찰관주재소(陽城警察官駐在所)로 향하여 일본인 순사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지 못할 것이 없다. 순사가 이에 응하면 가하거니와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취할 수단이 있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최은식·이덕순·이근수·홍창섭 역시 “조선은 독립국이 될 터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한 고로 우리가 함께 원곡면·양성면 내에 있는 순사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을 파괴할 것이다. 또한 일본인을 양성면 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는 고로 일본인을 양성에서 쫓아내자”고 연설하였다. 시위 군중은 이에 찬동하고 양성면 동항리로 진입하였다.같은 날 밤 9시 30분부터 양성면민 수백 명도 만세시위를 하기 위하여 양성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다가 9시 50분경에 해산하고 돌아가다가 성은고개를 넘어 오던 원곡면민과 회합하면서 시위 군중은 약 2,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시위 군중은 밤 10시경 다시 양성경찰관주재소에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돌을 던지고 유리창을 부순 후 불을 질러 주재소와 순사 숙직실 각 1동 및 공동서류·물품·가구 등을 전부 소각하였다. 이후 양성우체국으로 가서 사무실과 실내 전화기·공용서류·물품·가구 등을 전부 파괴하고 금고를 파손하였다. 또한 안성과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하여 연락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어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대금업자의 건물을 파손하고 불을 질렀다. 이후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공용서류와 물품을 파손한 후 소각하였다.4월 2일 오전 4시경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사무실 건물과 공용 서류와 물품 모두를 소각하였다. 이처럼 시위 군중과 함께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붙잡혔다.이 일로 1919년 12월 4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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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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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기념관 안성 3·1운동 기념관 경기도 안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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