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19년 3월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마장면(麻長面)에서 오천(午川)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월 30일 마장면 오천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4월 1일까지 3일간 계속되었다. 이기재(李起載) 등과 함께 3월 30일 오천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통문(通文)으로 각 마을에 알렸다. 약속한 장날 1,000여 명의 면민들은 평화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른 뒤, 이틑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이날 이창호는 헌병분견소장에게 붙잡혀 분견소에서 신문을 받기도 했으나, 군중의 석방 요구로 풀려났다.
이튿날인 31일 오전 9시, 약속대로 양촌리(陽村里)에 1,000여 명의 면민이 모이자, 이창호는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군중을 이끌고 오천리를 한 바퀴 행진하였다. 이들이 음지다리를 건널 때, 일제 헌병이 양쪽을 가로막고 군중을 다리 위로 몰아넣는 바람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리가 무너져 사람들이 떨어졌다. 이 혼란을 틈타 개천가 숲속에 잠복했던 헌병들이 발포하자,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튿날 헌병보조원들은 상복으로 변장하고 각 마을을 돌며, 미리 표시했던 사람을 차례로 체포하여 이천헌병분견소로 압송하였다.
1919년 5월 31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여주지청(驪州支廳)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0년 4월 27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三一獨立運動實錄(三一同志會, 1985) 上 393~395면
-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5) 362면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91면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