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수원(水原) 출생으로,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始興郡秀岩面)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 해 3월 29일 이봉구(李鳳求)로부터 동군 화정리(花井里) 일대에 이튿날의 독립만세 운동 계획에 참가를 권하는 격문이 돌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3월 30일 오전 10시경, 집합 장소인 수암리(秀岩里) 비석거리(碑石洞)로 나아갔다.
여기서 그는 유익수(柳益秀)·홍순칠(洪淳七) 등과 함께 18개 동일에서 모인 2천여 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마침 와리(瓦里) 사람들이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읍내로 시위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군중과 함께 공립 보통학교·경찰 주재소·면사무소를 차례로 시위 행진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주동자 검거 때 체포되었으며, 이 해 5월 27일 경성(京城)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0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279∼2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38∼13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