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秀岩面)에서 윤병소(尹秉昭)·윤동욱(尹東旭)·유익수(柳益秀)·김병권(金秉權)·이봉문(李奉文)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다음날인 3월 30일 비입동(碑立洞)에 집결하기로 하여 주민들에게 통고한 결과 2,000여명의 군중이 모이게 되자 윤익수·윤병소 등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군중이 따라 독립만세를 화창(和唱)하여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普通學校)와 공자묘(孔子廟)를 돌며 시위를 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279·2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