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24일 경기 (京畿) 양평군 (楊平郡) 갈산면 (葛山面) 양근리 (楊根里)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진규 (李盡珪) 가 주도하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와 격문 각 수백 매를 시장에 집합한 1천여명의 군중들에게 배부하고 그들과 같이 독립만세를 고창 하며 행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 (逮捕) 되어 징역 8월을 받았으며, 1922년 1월 양재은 (梁在殷) 과 함께 대한민국 (大韓民國) 임시정부 (臨時政府) 지원을 위해 군자금 (軍資金) 모집 (募集) 활동을 하다가 체포 (逮捕) 되어 징역 7년을 받고 1929년 3월 29일 출옥 (出獄) 하였으며, 1934년에는 양평 (楊平) 적색농민조합 (赤色農民組合) 에서 활동을 하는 등 총 8년 여 (餘) 의 옥고 (獄苦)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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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신규(李藎珪)가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하고, 1,0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곽영준은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고, 동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곽영준은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활동하던 중 동년 7월 양재은(梁在殷) 등과 회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22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7호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았고, 동년 3월 29일 공소기각 되었다. 1931년에는 양평군에서 양평농민조합준비회(楊平農民組合準備會)의 지제지부(砥堤支部) 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양평적색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2. 3. 29)
- 사상에 관한 정보 7(楊平警高秘 第197號:1934. 2. 16)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183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7. 9)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권 209면
- 判決文(高等法院:1919. 10. 23)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22. 1. 19)
- 身分帳指紋源紙(警察廳)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493~496면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