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양근 지역의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로 재직하고 있던 이신규가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大韓獨立會)’ 명의로 된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1919년 3월 24일 이곳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하였다. 이신규는 양평군의 만세시위가 평온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울에서 특파되었다. 3월 24일은 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는 길가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조선 민족이 이 기회에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하지 못하면 큰 일”이라는 요지의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직후 체포된 이신규는 1919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요양하다 28세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26. 1. 25)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7. 9)
- 判決文(高等法院:1919. 10. 23)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8. 8)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493~49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183~1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