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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5월 3일(음력) 충북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개동(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에서 아버지 재기(在綺)와 어머니 청해(靑海) 이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윤재(允哉), 호는 은재(殷哉) · 혹은 죽촌(竹村) · 춘정(春汀)이다.
가난한 유교 선비집안에서 출생하여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부터 할아버지 광소(光紹)로부터 한문을 공부하였는데 13세 때부터 『소학』을 3년 동안 무릎 끓고 공부하면서 충과 효, 예와 의를 정신수행의 가치로 삼았다.
15세 때 아버지와 할머니의 별세를 겪으며 정신적으로 방황하여 한 때 유부녀와 동거생활까지 하였지만 19세 때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고 불륜생활을 청산한 후 고향에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97년(23세) 조치원에 거주하던 전주 이씨 치헌(致憲)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泰華, 泰獻) 1녀(泰惠)를 두었다.
결혼 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양반 자제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업을 삼다가 1901년(27세) 고향 친구 김진우(金鎭宇)의 부탁을 받고 전당포 사업에 참여했지만 5년 만에 파산하였다. 그리고 횡령 혐의로 구속될 친구를 대신하여 3개월 옥살이를 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거짓 사망신고를 내고 1906년 연말에 고향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온 후 도사 벼슬을 지낸 윤자정(尹滋貞)의 자제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친구 김진우를 만났다. 김진우는 그 사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선교사 도움을 받아 임진강 고랑포에서 약방을 하고 있었다. 친구 김진우의 초청으로 고랑포로 갔는데 그곳에서 김진우와 고랑포교회 교인들로부터 집중적인 전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기독교와 유교 중에 어느 종교가 참된 종교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 고서 『통감』에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한 것은 “도무지 도가 없음이라(太無道)”라는 구절에 비추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참 도’가 필요한데 기독교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그래서 3개월 ‘심중전(心中戰)’ 끝에, “참으로 나라를 구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스럽게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결단하고 1907년 7월 14일부터 고랑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 같은 고향(청주) 출신 정춘수(鄭春洙) 전도사의 내방을 맞았다. 신석구와 동갑으로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던 정춘수는 1903년 원산의 하디(R.A. Hardie) 선교사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남감리회 전도사가 되어 개성지방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정춘수의 소개로 개성으로 옮겨 방금 내한한 남감리회 의료선교사 레이드(W.T. Reid)의 어학선생이 되었고 1908년 3월 29일 개성남부교회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왓슨(A.W. Wasson)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개성남부교회 주일학교 교장을 거쳐 1909년 2월 개성 북부교회 권사가 되어 평신도 신분으로 설교하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1910년 10월 강원도 홍천읍교회로 옮겼으며 1912년 9월 남감리회 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을 받은 후 1914년 가평구역 담임, 1915년 춘천지방 순행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1917년 9월 연회에서 킬고(J.C. Kilgo)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18년 10월 연회에서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으로 파송을 받았다.
수표교교회에 파송을 받은 지 5개월 만에 3 · 1운동을 맞았다. 그가 속한 남감리회측 만세운동은 1919년 2월 16일, 당시 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춘수 목사가 서울 종교교회 저녁집회에 참석했다가 종교교회 담임자 오화영(吳華英) 목사와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오화영과 정춘수는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였던 미감리회의 박희도 전도사,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인 북장로회 이승훈 등과 접촉하면서 기독교계 민족대표 구성작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2월 20일 경 오화영 목사로부터 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즉각 답하지 않고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 하였다. 신앙이 보수적이었던 그는 첫째, 목사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지 둘째, 기독교 목사로서 교리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천도교와 합작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 문제를 갖고 매일 새벽 수표교교회에서 기도하였는데 2월 27일 새벽에, “4천년 전하여 나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하는 ‘신의 음성’을 듣고 즉시 뜻을 정하였다.
곧바로 그 뜻을 오화영 목사에게 전했고 2월 27일 오후 1시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모인 기독교측 대표자 회합부터 참석하였다. 즉 이필주와 이승훈, 박희도, 최성모, 김창준, 오화영, 박동완 등 기독교 대표자들과 함께 함태영이 가져 온 『독립선언서』 초안을 검토하고 그것에 서명한 후 정식 문건이 인쇄되어 나오면 날인하도록 도장을 함태영에게 맡겼다.
그리고 이튿날인 2월 28일 저녁 재동 손병희 사택에서 모인 민족대표 회합에도 참석했는데 그 때 거기서 처음으로 천도교 대표와 불교 대표들을 만났다. 그리고 2월 28일 회합에서 결정한 대로 3월 1일 오후 2시, 명월관(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민족대표 29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경무총감부에 연행되었다.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일본이 독립을 허락할 것 같은가? 시기상조다.” 하며 만류하였을 때 그는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하였다. 그는1949년 민족대표로 참가하게 된 이유에 대해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을 터이라고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은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찬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삼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만족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그의 독립 의지는 체포 후 이루어진 경찰과 검찰, 판사 심문에서도 확인되었다. 우선 3월 1일 경무총감부에 연행된 직후 경찰 심문에서 “어떠한 일로 독립을 하려고 하였는가?” 질문에 “선언서와 같다. 나는 조선은 조선 민족으로 통치하도록 하려고 생각하였다.
조선은 일본이 약탈하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원수라고 하지마는 우리들은 신에게 몸을 바치고 있으니까 그 원수를 갚겠다고는 하지 않고 신의 마음으로 조선을 독립할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결코 일본을 위하여 이권을 제공하는 나라가 될 수 없으므로 독립하려고 한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3월 18일 기소된 직후 검찰 신문에서 “피고는 조선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는 질문에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고 답하였고 재차 “장래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는 질문에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 할 생각이다.”고 답했다.
그리고 5월 5일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이루어진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에서 “피고는 독립국이 꼭 되려고 선언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선언을 하는 데만 그치려고 한 것인가?”는 질문에 “형식상 조선 독립은 성립되고 있지 않으나 씨를 심을 때에는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청원한다고 하는 것은 실은 청원이 아니고 독립한다는 것을 통지한 것이다. 우리가 대표자로서 명의를 낸 것은 조선인 전체가 이 의견이라고 생각한 것이며 세계 각국이 민족 자결을 제창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독립이 되리라고 믿고 또 그 일을 통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본의 쇠사슬을 벗어나려 생각하고 있다.”고 답하였다.
사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제일 늦게 참여하였기 때문에 그의 표현대로, “한 일은 별로 없으나” 독립운동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다. “신의 뜻으로 알고 참여했다.”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참여였기에 그 의지가 더욱 분명했다. 그래서 1920년 10월 12일 경성복심법원 공판에서 검사는 신석구를 손병희와 최린, 이승훈, 한용운, 오화영, 최남선 등과 같은 ‘주모자급’으로 분류하여 최고형인 3년형을 구형하였고 그해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한용운과 김중삼, 김성업, 정태용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유(交遊)하였고 만세시위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청년화가 이당(以堂) 김은호가 그에게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천도교측 민족대표였던 이종일은 훗날 비망록에서 신석구에 대하여 “손병희 선생과 같이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마음 든든한 바 있었다.”고 진술할 정도로 옥중에서 흔들리지 않는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미결수로 지낸 8개월을 포함, 2년 8개월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4일, 박희도 · 신홍식 · 이필주 · 이명룡 · 양전백 등 다른 민족대표 16인과 함께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하였다.
이후 목회에 복귀하여 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였고 1922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4년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25년 고성구역, 1927년 가평구역, 1929년 철원읍교회, 1931년 강원도 이천교회, 1935년 천안읍교회를 담임하면서 이안지방 감리사, 천안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이렇게 석방된 후에는 교회 목회를 주로 하였지만 1925년 흥업구락부에 가입,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7월 서울에서 흥업구락부사건이 터지자 그도 천안경찰서에 2개월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1939년 진남포지방 신유리교회, 1944년 유사리교회로 파송되었는데, 그 무렵 정춘수 감독이 혁신교단을 창설하고 노골적으로 ‘친일노선’을 취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였고 1945년 5월 교회에 전승기원 일장기 게양을 거부한 이유로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해방과 함께 풀려난 그는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고에도 “남은 양(교인)들을 돌봐야 한다.”면서 유사리교회 목회에 복귀하였고 1948년 문애리교회로 옮겼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노선에 투철했던 그는 공산주의 정권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1946년 3 · 1절 기념방송사건을 필두로 서부연회 재건과 기독교민주당 및 기독교자유당 사건 등에 연루되어 정치보위부에 수차례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결국 1949년 4월 19일, 소위 ‘진남포4 · 19사건’으로 불리는 진남포지역 반공비밀결사 조직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된 후 평남재판소(재판장: 허정숙)에서 사형, 인민위원회 최고재판소(소장: 김두봉)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10월, 평양 탈환 직전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1968년 7월 9일 국무회의 결의에 따라 9월 1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선열 묘역에서 묘소를 마련하고 의관장을 거행하였다.
저술로는 번역서인 『빌립보서 주석』(동양서원, 1912)과 1949년 기록한 『자필 자서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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