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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480
성명
한자 朴受永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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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2 훈격 대통령표창
1919. 4.21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양변면(兩邊面) 금마리(金馬里)에서 박광훈 외(朴光勳外) 3명과 함께 주동자(主動者)가 되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을 때 영월군수(寧越郡守)내리(來里) 하자 독립만세연명부(獨立萬歲連名簿)기명(記名)케 하고 태극기를 주어 흔들게 하며 독립만세를 고창(高唱)케 하며 수십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연창(連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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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강원도 영월(寧越) 사람이다.

1919년 4월 21일 영월군 주천면(酒泉面) 금마리(金馬里)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박광훈(朴光勳)·박재호(朴在鎬)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강연을 하기 위해 금마리에 오자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에 서명하도록 한 후 군수에게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케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공소하여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형을 다시 선고받아 상고하였으나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8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7. 7 경성복심법원)
  • 판결문(1919. 9. 18 고등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595·596면
  • 판결문(1919. 5. 19 경성지방법원)
  • 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국회도서관) 14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수영 - 강원 영월(寧越) -
본문
1871년 9월 28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양변면(兩邊面) 금마리(金馬里, 현 주천면(酒泉面) 금마리)에서 태어났다. 50세가 되던 1919년 4월 21일 양변면 주천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영월군 양변면 만세운동을 처음 제의한 사람은 같은 마을에 사는 박광훈(朴光勳)이었다. 박광훈의 아버지 박수창(朴受昌)은 양변면 면장을 지낸 유지였으며, 박광훈도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그 해 4월 20일 오전 9시경 박수창의 집에서 박광훈으로부터 이용헌(李容憲)·이병익(李炳翼)·박재호(朴在鎬) 등과 함께 금마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받았다. 평소 만세운동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박광훈의 제의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용헌·이병익·박재호 등도 모두 동의하면서 구체적인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논의 결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과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며, 박춘희(朴春喜)와 김창진(金昌鎭)·박수찬(朴受燦) 등이 만세시위 때 쓸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그런데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4월 20일 오후에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만세시위 장소와 날짜를 변경하였다. 당일인 20일 오후, 군수가 강연하는 곳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한 것이다.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리며 분주히 움직였다. 박광훈이 발의하여 만세시위에 동참을 약속하는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를 만들었고, 각 집을 방문하여 명부에 서명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영월군수가 그날 오지 않으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4월 21일 아침 군수가 강연을 위해 다시 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먼저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군수가 지나갈 길목에서 군중과 함께 기다리기로 하였다.그날 오후 군수 석명선이 금마리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 때, 군중과 같이 길목을 막아섰다.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군수는 마지못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군수의 만세 선창에 이어서 군중과 함께 한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박광훈과 이병익이 군수에게 「만세연명부」에 서명할 것을 강권하자, 군수와 일행은 마지못해 서명하고 군중과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와 함께 주천장터와 마을을 돌며 평화로운 시위를 펼친 후 해산하고 귀가하였다.영월군수가 돌아간 이후 저녁 무렵 주천헌병파견소(酒泉憲兵派遣所)에서 일본군 헌병과 보조원, 보병들이 금마리를 급습하여 만세운동 주도자와 참여자들을 잡아갈 때 같이 붙잡혔다.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영친왕(英親王)의 혼인으로 내려진 ‘은면(恩免)’으로 4월 28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 6월 경성지방법원 1919-05-1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원판결취소, 징역 8월 경성복심법원 1919-07-07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18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범 - - - 국사편찬위원회
5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8월 경성복심법원 1919-07-0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강원도 영월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동상 금마리 독립만세 상 강원도 영월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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