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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107
성명
한자 朴光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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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4.20~21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양변면(兩邊面) 금마리(金馬里)에서 이용헌(李容獻) 이병익(李炳翼)등과 같이 독립만세 계획(獨立萬歲計劃)수립(樹立)하고 태극기(太極旗)제작(製作)하여 주천장(酒泉場)을 보러가던 주민(住民) 70여명(餘名)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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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강원도 영월(寧越)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兩邊面 金馬里) 박씨문중 마을에 살았는데, 양변면장을 지낸 박수창(朴受昌)은 이마을의 실질적인 주관자였고 그의 아버지였다.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은 그의 집에서 이용헌(李龍獻)·이병익(李炳翼)·박수영(朴受永)·박재호(朴在鎬) 등에 의해서 수립되었으며 박춘희(朴春喜)·김창진(金昌鎭) 등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20일 영월군수가 이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을 만세시위 날짜로 결정한 후 아래 윗마을을 다니면서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를 작성하였는데, 4월 20일 군수가 오지 않고 다음날 21일에 오게 되었다.

마침 4월 21일 주천 장날이었다. 이들은 장꾼 70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거리를 시위하다가 이날 저녁 급파된 헌병에게 총과 몽둥이로 구타당하며 붙잡혔다.

그는 이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5. 19 京城地方法院)
  • 判決文(1919. 7. 7 京城覆審法院)
  • 判決文(1919. 9. 18 高等法院)
  • 韓國民族運動史料 (3·1運動篇) (國會圖書館) 14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59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964∼967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광훈 - 강원 영월(寧越) 영월군 만세운동
본문
1882년 7월 11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양변면(兩邊面) 금마리(金馬里, 현 주천면 금마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양변면 면장을 지낸 박수창(朴受昌)이다. 1919년 4월 21일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 주천(酒泉)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거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항상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를 결심하고, 뜻을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1919년 4월 20일 오전 9시경 아버지 박수창의 집에서 처남 이용헌(李容獻)과 이병익(李炳翼)·박수영(朴受永)·박재호(朴在鎬) 등을 만나 금마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이용헌·이병익 등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주천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박춘희(朴春喜)·김창진(金昌鎭)·박수찬(朴受燦)은 시위 때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그런데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농사 강화(講話)를 위해 4월 20일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 장소를 군수가 연설할 강연장으로 바꾸고, 거사 날짜도 하루 앞당기게 되었다. 만세운동에 동참한다는 승낙 문서인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를 만들어, 이를 가지고 각 집을 방문하여 시위 계획을 알리고 참여자들에게 서명을 받았다. 이렇게 치밀하게 시위 준비를 하였지만, 이날 군수가 오지 않으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4월 21일 석명선 군수가 온다는 소식에 주동자들과 다시 모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장날을 맞아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모아 시위 계획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주동자들과 함께 군중을 모아 금마리 길목에서 군수를 기다렸다. 오전 11시경 군수 석명선이 금마리에 도착하여 마을 지도자인 아버지 박수창에게 「만세반대자명부(萬歲反對者名簿)」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박수창이 서명을 거부하자 군수 일행과 실랑이가 오고 가면서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강연을 끝낸 군수가 금마리에서 주천리(酒泉里)로 가려고 할 때 이병익·박수영 등과 같이 군중을 이끌고 와서 군수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하며 군수에게 태극기를 주었다. 군수가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 200명이 넘는 군중의 기세에 눌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수가 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본 군중과 함께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어서 이병익과 함께 군수에게 「만세연명부」에 서명할 것을 강권하자, 군수는 마지못해 명부에 서명하였다. 일행인 군주사(郡主事) 민범식(閔範植)과 면서기(面書記) 지형태(池亨泰)도 서명하고 만세를 불렀다. 군수를 앞세워 마을과 주천장터를 돌며 만세시위를 펼쳤고, 이후 자진 해산하였다.군수가 돌아가고 저녁이 되자, 주천헌병파견소 소장 나카호리(中堀)와 보조원 조병욱(趙炳旭)이 보병 5명을 데리고 금마리에 왔다. 이들은 「만세연명부」를 압수하고 주도자들을 구타하며, 명부에 서명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 69명을 붙잡아갔다.이 일로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그 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은사령’으로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2년 경성지방법원 1919-05-1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원판결취소, 징역 1년 경성복심법원 1919-07-07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18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1년 경성복심법원 1919-09-18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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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동상 금마리 독립만세 상 강원도 영월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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