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강원 양구(楊口)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양구군(楊口郡) 양구면(楊口面) 죽곡리(竹谷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김병하(金炳夏)는 정승원(鄭昇源)·최우명(崔遇明)과 함께 4월 5일에 궐기할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와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김창헌(金昌憲)에게 연락하여 천도교도들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 관헌의 감시가 심해져서 천도교 지도자들은 봉기 날짜를 4월 2일로 변경하고, 최영구(崔榮九)와 김명옥(金明玉) 등은 변경된 계획을 천도교도들에게 연락하였다.
하지만 봉기 하루 전날인 4월 1일에 갑자기 눈이 내리자 주동자들은 재차 봉기 날짜를 3일로 변경하였다.
봉기 당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곡리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양구군청 앞에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서 주동자 모두가 붙잡혔다.
김병하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8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5. 20)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1919. 6. 27)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2輯 42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943∼944面
- 判決文(高等法院, 1919.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