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금릉(金陵) 사람이다.
기독교(基督敎)인으로서 1919년 4월 2일의 성주읍(星州邑)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정(李基定)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대가면 옥화동(大家面玉化洞)교회의 목사인 그는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기독교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인근의 각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이기정·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장석영(張錫英)·송훈익(宋勳翼)·김희규(金熙奎)·송준필(宋浚弼)·이봉희(李鳳熙)·송회근(宋晦根)·송문근(宋文根)·송인집(宋寅輯)·송규선(宋圭善)·송천흠(宋千欽) 등 군내의 유력한 유림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있음을 알고, 유림측의 송회근과 만나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그에게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부탁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경, 그는 계획대로 경산동 관제묘(京山洞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과 함께 성주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장에서 대기중이던 유림들을 중심으로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도중 일제의 발포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나, 그는 이날 밤 10시경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에도 그는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등사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이듬해 8월 의성군(義城郡) 비봉리(飛鳳里) 교회의 김충한(金忠漢) 목사에게 독립신문을 전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대구(大邱)지방법원 성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진주(晋州)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206면
- 형사공소사건부(1920. 11. 29 확정)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6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