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현재 熊東面) 마천리(馬川里) 면사무소 앞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웅천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계광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이 웅천의 유지인사에게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면서 비롯되었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오전 11시 경, 웅천면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는 5, 6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배종인은 주도자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준 뒤,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배종인은 시위군중을 선두에서 주도하며 웅천면을 향해 행진하여 나갔다. 그때 연도 주변에 거주하는 대중들이 모두 자진하여 대열에 합류하면서 시위군중은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진해로부터 급파된 일본 헌병 6명과 일경 4명의 지원을 받은 일경들은 무차별적인 구타로 시위군중을 해산하고,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도 현장에서 붙잡혀, 이해 5월 26일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에도 그는 1921년 4월 8일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3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昌原郡 熊東面 獨立運動紀念碑(1986. 8. 15 건립)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5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