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28일 노온사리(老溫寺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학생으로서 귀향하여 있던 중, 3월 27일 같은 동리에 사는 이정석(李貞石)이 서면 소하리(西面所下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노온사리에 있는 경찰 주재소에 연행되어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그는 최호천(崔浩天)과 함께 동리사람들에게 주재소에 갇혀 있는 이정석을 구하자고 제의하여 1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향하던 중, 내가대리(內加垈里) 주민 1백여 명의 가세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그는 군중의 지휘를 맡고 최호천이 통솔하였으며, 이종운(李鍾雲)·김인한(金仁漢)·최정성(崔正成)·유지호(柳志浩)·최주환(崔周煥) 등이 선두에 서서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시위군중은 주재소 게시판을 쓰러뜨리고 뒷벽을 파괴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으나, 그 곳의 순사와 순사보들은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이에 그는 군중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자신이 인솔하고 다른 군중은 최호천이 인솔하여 각각 이정석을 체포했던 조선인 순사보 김정환(金定煥)과 최우창(崔禹昌)을 잡으러 다녔다.
결국 잡지 못하고 다시 주재소에 모여서 독립만세와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자, 주재소 안에 숨어 있던 일본인 순사 적송(赤松)이 불을 켜고 나와 이정석의 석방을 약속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을 보통학교 뒤쪽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만세를 외치게 하고 해산시키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계속 끈질긴 법정투쟁을 하였으나, 1920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40∼14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282∼2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