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3.28 경기도 (京畿道) 시흥군 (始興郡) 서면 (西面) 소하리 (所下里) 에서 최호천 (崔浩天) 등과 함께 3.27 독립만세 시위 (獨立萬歲示威) 를 하다 구금 (拘禁) 된 이정석 (李貞石) 을 구출 (救出) 하기 위하여 군중 (群衆) 500여명 (餘名) 과 함께 노온사리 (老溫寺里) 주재소 (駐在所) 를 습격 (襲擊) 하여 게시판 (揭示板) 과 뒷벽 (壁) 등을 부수며 왜경 (倭警) 들에게 이정석 (李貞石) 을 석방 (釋放)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 (威脅) 하며 독립만세’ (獨立萬歲) 를 고창 (高唱) 시위 (示威) 중 피체 (被逮) 되어 징역1년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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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시흥군 서면 소하리(西面 所下里)에 거주하였으며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면 소하리에서는 1919년 3월 27일 동리에 사는 이정석(李貞石)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노온사리(老溫寺里) 경찰주재소에 강제 연행되자 이것이 봉기의 발단이 되었다.
3월 28일 최호천(崔浩天)·김거봉(金巨奉)·최정성(崔正成) 등과 같이 구금된 이정석을 구출코자 군중 500여 명과 함께 노온사리 주재소를 습격·파괴하였다. 군중이 몰려오자 주재소 안에 있던 일경들은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군중이 함성을 올리며 일경들을 죽인다고 위협하자 "이정석은 본서로 넘겨 여기에는 없으니 본서에 가서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하여 시위군중은 보통학교 뒷산으로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간악한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騷擾)죄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282∼28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38∼14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