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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377
성명
한자 朴炳喆
이명 朴有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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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대통령표창
1919. 4. 2 충북(忠北) 음성군(陰城郡) 대소면(大所面) 오류리(五柳里) 뒷산에서 송인식(宋寅植) 등 수십명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고 동면사무소(同面事務所)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笞)90과 벌금(罰金) 20(圓)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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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북 음성(陰城)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2일 충북 음성군 대소면(大所面) 오유리(五柳里)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소면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박병철을 비롯하여 민병철(閔丙哲)·박영록(朴永祿)·박제성(朴濟成) 등이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2일로 정하고,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포섭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4월 2일 밤 면사무소에 운집한 군중은 1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 간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 면장과 면직원이 시위의 해산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두 차례에 걸쳐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의자들을 부수고 기구, 장부 등을 파손시키면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또한 시위를 탄압하는 일경에 대하여 육탄전을 벌여 일경에 중상을 입혔으며, 면사무소를 불지른 다음 뒷산에 올라 밤이 새도록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진천의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박병철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10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와 벌금 20원의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5. 10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64·6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병철 박유산(朴有山) 충북 음성(陰城) -
본문
1901년 10월 14일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 대소면(大所面) 오류리(五柳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유산(朴有山)을 사용하였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며, 4월 2일 대소면 오류리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대소면의 만세운동은 면사무소 앞에서 전개된 제1차 만세시위와 주도자들이 연행된 후 일부 주민들이 산 위에서 전개한 제2차 만세시위로 구분된다. 평소 일본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지니고 있던 임경순(林景淳)은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 이에 호응하여 대소면의 만세운동을 모색하였다. 임경순은 만세시위를 함께 준비할 동지 규합에 노력하여, 임백규(林百奎)·이성교(李聖敎)·유해길(柳海吉)·김달년(金澾秊)·김동식(金東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말에 열린 비밀회의에서 4월 2일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마을 별 연락망 구성, 만세시위에서 배포할 독립선언문 인쇄, 태극기 제작 등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준비하였다.만세운동에 대한 사전 연락을 받고, 4월 2일 밤 예정된 시간에 맞춰 오산리(梧山里)에 위치한 대소면사무소 앞으로 갔다. 오후 7시 면사무소 앞에 상당한 숫자의 주민이 모이자, 임백규가 주민들을 향해 ‘조선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선창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수백 명의 주민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즉각 나와 만세시위를 중단하고 해산할 것을 위압적인 태도로 강요하였다. 이에 임백규·김동식·김달년 등이 먼저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기물을 파괴하며 공격을 선도하였다. 이들의 지휘에 따라 다른 주민들과 함께 돌을 던져 면사무소 창문을 깨뜨리고, 집기와 문서를 파기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만세시위가 격렬한 양상으로 발전하자 일제 당국은 진천(鎭川)에서 헌병수비대를 출동시켜 무력으로 대소면의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임백규·김동식·김달년 등 주도자들을 붙잡았다. 이것으로 면사무소 앞에서의 만세시위는 중단되었으나, 다른 양상으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만세시위 주도자들이 연행되자 곧바로 시위대가 해산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만류하였다. 함께 시위 군중의 해산을 만류하고 있던 박영록(朴永綠)·박제성(朴濟成)·민병철(閔丙哲)·송인식(宋寅植) 등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주민들을 다시 규합하였다. 이들과 함께 잔류한 시위 군중을 지휘하여 오류리 뒷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제2차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에 붙잡혀 오류리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919년 5월 10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와 벌금 20원(벌금 미납시 20일 노역장 유치)을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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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태 90 및 벌금 20원 벌금완납않을시 20일간 노역장 유치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1919-05-1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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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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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음성 기미 3·1독립만세 추념비(대소면) 충청북도 음성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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