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충북 충주(忠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8일 충주면 칠금리(漆琴里)에서 동지들과 함께 충주 장날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던 중 붙잡혔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0일 경, 충주간이농업학교 졸업기념 야유회가 열린 범바위(虎岩里)에서, 이날 참석했던 교사 유흥식(柳興植)과 학생 오언영(吳彦泳)·장천석(張千石)·유석보(劉錫寶) 등이 충주 장날인 3월 15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면서 추진되었다.
그들은 거사에 차질없도록 하기 위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때 서울 신학교 재학중이던 장양헌은 서울에서 가지고 온 경고문을 비밀리에 교회 안에서 수백 매를 복사하였으며, 기독교회측과 연계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결정에 따라, 교회측과의 연락을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비밀이 거사 전에 탄로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경고문은 최집사 등에 의해 각처에 배포되었고, 시위 장소는 탄금대(彈琴臺)로 바뀌어 계속해서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였다.
김종부는 장양헌·오언영·최집사 등과 더불어 4월 8일 경 충주 공립보통학교 여교원 김연순(金連順)에게 독립운동계획서를 보내어, 충주 장날 만세운동에 동교 여학생들을 참가시키도록 하자는 권유문을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김종부는 자기의 왼팔을 찔러 그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장양헌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을 고취시키는 문장을 쓰도록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극기와 경고문·독립가(獨立歌)와 일반 태극기 10여 개를 우여곡절 끝에 김연순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번 독립만세 시위운동도 결국 거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일경에게 붙잡혀, 이해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095·1096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7輯 232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