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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05
성명
한자 金舜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4.8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군동면(郡東面) 하동리(下東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고자 동지 김교윤(金敎潤)과 함께 동민(洞民)을 결집시키고 수십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이어서 남쪽 산위에 올라가서「횃불」을 올리며 시위하다 일 헌병대(日憲兵隊)가 반격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 피신하였으나 동지들이 왜경에게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자진하여 옥천경찰서(沃川警察署)로 나아가서 피체되어 징역6월을 받고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사(獄中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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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0면
  • 판결문(1919. 6. 18 공주지방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81. 9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순구 - 충청북도 옥천(沃川) 3.1운동
본문
1867년 10월 16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군서면(郡西面) 하동리(下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옥천군 읍내(邑內) 시위, 3월 23일 청주군(淸州郡) 강내면(江內面, 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횃불시위, 3월 30일 미원장터 시위, 4월 8일 군서면 횃불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각 지방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본받아 자신의 고향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기획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옥천군 읍내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가 활발하지 못하자 청주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이어갈 것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23일 밤 청주군 강내면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을 들고 독립 만세 운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강내면의 18개 마을과 인접한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남이면(南二面)의 각 동리(洞里)도 이에 호응하여 횃불을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과 수비대가 청주와 조치원(鳥致院)에서 출동하여 강제 진압하였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새벽 1시경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횃불시위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여파는 충남 연기군(燕岐郡, 현 세종특별자치시)은 물론 경기도까지 파급되었다. 1919년 3월 30일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5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나머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미원장터 시위 이후에 회인(懷人)의 학자 진(秦)씨 집에서 잠시 요양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1919년 4월 8일 오후 9시경 김교윤(金敎潤)에게 마을 주민을 모으도록 부탁하였다. 50여 명의 주민이 모이자 그들을 이끌고 박래현(朴來賢)의 집 부근 우물가로 가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다음 군중을 이끌고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 앞산 위로 올라가 모닥불을 피우고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에 오동헌병주재소(梧桐憲兵駐在所) 헌병과 옥천군수비대(沃川郡守備隊)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회인·문의(文義)·청주·괴산(槐山) 등지를 돌면서 다시 독립 만세 운동을 재개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군서면의 동지들이 붙잡혀 고문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였다. 옥천경찰서 앞에서 일제에 의한 강제 합병의 부당성을 공박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엇이 죄가 되느냐고 항의하다가 붙잡혔다. 1919년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혐의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공주감옥에서 6월 28일 옥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정치범 처벌령위반 징역 6월 공주지방법원 1919-06-18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북도 옥천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당 충민사 충청북도 옥천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쌀안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충청북도 청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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