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강원도 횡성(橫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 횡성군 서원면(書院面) 분일리(分一里)에서 성태현(成泰鉉)·박민희(朴民喜)·이정헌(李正憲)과 함께 송병창(宋秉昌)의 집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협의하고 주민 70여명을 규합하여 분일리내 향산(香山)과 수동(水洞) 사이의 뒷산에 올라가 봉화(烽火)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시 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산에서 내려와서 마을을 순회하며 밤새도록 시위를 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야 해산하였는데 그는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8년경 신간회(新幹會)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1945년에 이르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며 우리의 민족혼 찾기 운동에 앞장서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579∼581면
- 판결문(1919. 5. 15 경성지방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950∼95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