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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297
성명
한자 金啓鎬
이명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6 훈격 대통령표창
1919. 4월 (初) 강원도(江原道) 양양군(襄陽郡)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示威)를 준비하고 4월 4일 양양읍(襄陽邑)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 운동(示威運動)에 참여하였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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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교회 청년이었던 김계호는 김재귀·김주호(金周鎬) 등을 동지로 포섭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은 양양군 임천리(林泉里)를 거점으로 삼고,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김계호는 4월 3일 김필선·김재귀 등과 함께 양양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백지 200매에 '대한독립만세 양양군(大韓獨立萬歲 襄陽郡)'이란 글씨와 태극모양을 인쇄하고, 성남동 뒤에 있는 상여 보관처에 숨어 옥양목으로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준비를 차질없이 진행시켜 나갔다.

그런데 만세운동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경에 의해 제작된 태극기가 압수되고 말았다.

이때 김계호 등 일부 인사들은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나 만세시위의 준비를 예정대로 강행하였다. 거마리(車馬里) 김종태(金鍾台)의 집으로 본거지를 옮긴 이들은 다음 날의 거사를 위해 태극기를 밤새도록 준비하였고, 마침내 거사 당일까지 필요한 준비를 차질없이 마칠 수 있었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오전 11시경, 양양읍 장터에는 4,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김계호는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한편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만세시위의 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혀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每日申報(1919. 5. 3)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974·975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612·613面
  • 判決文(1919. 5. 31. 京城覆審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76面
  • 江原道抗日獨立運動史(光復會江原道支局) 第1卷 308·309面
  • 判決文(1919. 7. 3. 高等法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계호 - 강원도 양양(襄陽) -
본문
1902년 7월 1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양양면(襄陽面) 청곡리(靑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양양등기소(襄陽登記所)에서 일하고 있었다. 양양면의 독립 만세 시위 준비는 유림과 기독교인에 의해 3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계는 양양감리교회(襄陽監理敎會) 청년부원 김필선(金弼善)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조영순 전도사의 딸이자 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인 조화벽(趙和璧)이 3월 말 양양을 찾아와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때 김필선을 비롯하여 양양보통학교(襄陽普通學校) 8회 동창생이자 평소 같이 교회에 다니던 친구인 김재구(金在龜)·김규용(金圭容)·김주호(金周鎬)·김봉운(金鳳運)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였다. 동창생들과 함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서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상여 보관처인 곳집에 숨어 들어가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때 유림계를 중심으로 임천리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최인식(崔寅植)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시위를 추진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양양면과 이웃 서면(西面)에 마을마다 책임자를 두고 많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3일 군수 이동혁(李東赫)과 군청 관리 심운택(沈雲澤)을 앞세우고 관리와 경찰들이 임천리를 급습하여 22명을 체포할 때, 검거를 피하여 최인식·김필선·김재구·김규용 등과 함께 거마리(車馬里)에 있는 김종태(金鍾台)의 집에서 밤새 시위를 준비하였다. 4월 4일은 양양 장날이었다. 양양면소재지로 들어오는 다섯 군데 길을 따라 장꾼과 함께 시위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때 양양감리교회 청년부원들과 함께 100여 군중을 이끌며 시위를 하였다. 양양 장터는 태극기와 만세 소리로 가득 찼고 독립선언서가 거리마다 뿌려졌다. 점심 때는 만세 군중이 더 불어나 4,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날 오후에 시위 지도부와 경찰이 임천리에서 체포된 22명의 석방 교섭을 하다가 손양면 가평리(柯坪里) 구장 함홍기(咸鴻基)가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난 시위대는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때려 부수었다.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손양면 간리(間里)에 사는 권병연(權炳淵)과 서면 상평리에 사는 김학구(金鶴九)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여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다시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8월(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9-05-3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7-0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멸실 묘소가 재난 등에 의해 사라진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양양 3·1운동 기념비 강원도 양양군
2 비석 양양 3·1만세운동 유적비 강원도 양양군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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