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는 양양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처남인 김명기(金明基)와 함께 힘을 모아 학자가 접근하기 힘든 서민사회에 조직을 펴는 한편,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을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포섭하였다. 그가 직접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게 된 것은 조화벽(趙和璧)이 3월말경 양양을 찾아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4월 3일 김필선(金弼善)·김재구(金在龜)와 함께 옥양목과 백지에다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김규용(金奎容)과 함께 같은 마을 이교정(李敎貞)의 집에서 다시 태극기를 만드는 중, 이 작업광경을 본 군수 이동혁(李東赫)이 인쇄기와 재료를 빼앗아 가자, 계획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일단 나머지 인쇄물을 가지고 거마리(車馬里)의 이종태(李鍾台)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보냈다. 드디어 이튿날 아침 이종태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오전 11시경 양양읍 시장에 이르러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1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974·97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