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상도 사람이다. 1923년 의군부(義軍府) 유격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의군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서 분열되어 1923년 2월 조직된 것이다. 분열의 발단은 국내에서 온 양기탁(梁起鐸)과 전덕원(全德元)과의 불화와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나 인선, 조직 등의 표면적인 문제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1920년 이래로 계속되어 온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과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과의 이념투쟁이었던 것이다. 즉 광복 후에 수립될 민족국가의 형태와 이념문제를 놓고 민족독립운동가들 간에 대립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제5중대장 김명봉(金鳴鳳)과 부대장 조태빈(趙泰 )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불신한다는 혐의로 피살되고 제5중대의 무기가 타중대에 의하여 강제로 압수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덕원은 환인현(桓仁縣)에서 새로이 항일군단을 조직하여 통의부에서의 분립을 선언하고 의군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의군부의 주요 간부를 보면 총장 채상덕(蔡相德), 군무부장 전덕원, 정무부장 김유성(金有聲),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사령장 오석영(吳錫泳), 부관 강규묵, 참모장 박대호(朴大浩), 대대장 박일초(朴一楚) 등이었다. 의군부는 조직된 이후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하고, 통의부를 적대시하며 통의부에서 관할하던 각 지방을 점령하고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상수는 1923년 8월경 의군부 군무총감 전덕원으로부터, 유격대장 이경일(李京日)의 지휘하에 동지 50명과 함께 평북 의주군(義州郡) 청성진(淸城鎭) 주재소의 습격을 명령받았다. 그리하여 작전을 전개한 후 이경일 등 동지 20명과 함께 귀환하던 중 김상수는 관전현(寬甸縣) 백석랍자(白石砬子)에서 알력이 심하던 통의부 김석하(金錫夏)부대에게 습격을 받고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7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