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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86
성명
한자 朴奎相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1 서울에서 경성약학전문학교생으로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독립선언서 태극기 등을 가지고 가서 주민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1,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아 복역 중 고문으로 병보석되어 귀가도중 서호강 상(西湖江上)에서 순국(옥중사 간주)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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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3월 11일 조극환(曺克煥)이 주동이 되어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켰으나 미리 계획이 일본군경에게 탐지되어 오히려 엄중한 수사와 감시만 강화된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산발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곧 중단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난국(難局)을 이겨내면서 그는 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으고, 읍내의 유지 조극환·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旻燮)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구림리와 읍내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본부로 정하고 시위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군서면 면서기로 있는 김재홍(金在洪)과 최민섭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 50여매, 독립선언서 6백여매, 독립신문 5백여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매를 등사하여 영암 보통학교 학생인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 등으로 하여금 배포케 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 그는 태극기와 유인물을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며 시위군중의 선두로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었다.

이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 중심가로 시위·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심한 병고로 보석되어 귀향하던 중, 서호강(西湖江)의 배안(船中)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27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군 605·606·60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5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규상 - 전남 영암(靈巖) 영암군 군서면 만세시위
본문
1893년 1월 21일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군서면(郡西面) 서구림리(西鳩林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 학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지고 영암으로 귀향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영암읍(靈巖邑) 장날에 조극환(曺克煥)이 중심이 되어 보통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켰으나 계획이 일제 군경에게 사전에 탐지되어 곧 해산 당하고 말았다. 3월 20일 밤에도 영암의 몇 개 지역에서 산상 시위가 있었지만 일제 군경의 무력 탄압으로 중단되었다.조극환은 3월 25일 자택에서 김민규(金敏奎)와 만나 시국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끝에 다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조극환은 3월 26일부터 31일까지 자택에서 태극기 300여 매를 제작하였고, 김민규는 3월 31일 자택에서 김영언(金永彦) 등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말하여 찬동을 얻었다.1919년 4월 6일 구림리(鳩林里) 박찬성(朴贊成)의 가게 앞에서 군서면 서기 김재홍(金在洪)·정학순(鄭鶴順) 등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일 경성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목격한 후 직접 입수해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낭독하며 동지들에게 내용을 설명하였다.임시 연락 장소는 서구림리의 간죽정(間竹亭)으로 하고, 영암읍과 구림의 두 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7일 밤 조극환·최기준(崔琪焌) 등과 군서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사용하여 조극환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500장, 경성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100장, 태극기 50장 등을 인쇄하였다. 4월 9일에도 김재홍·정학순·조병식(曺秉植)·최기준과 함께 구림리 김월봉(金月奉)의 집에서 등사판을 사용하여 『독립신문』 500장, 「독립가(獨立歌)」 100장을 인쇄하였고, 「독립선언서」 100장을 제외하고 4월 7일과 9일에 인쇄한 것 모두를 조극환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4월 9일 밤 「독립선언서」 100장을 구림리에서 구림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날 조극환이 김상학(金相鶴)을 보내 이튿날인 10일 오전 9시경 학생들을 등교 시간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을 전하였다.4월 10일 오전 9시 태극기와 유인물을 서구림리의 회사정(會社亭)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나팔을 불게하고 시위 군중의 선두로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1천여 명으로 증가한 시위 군중과 함께 읍내 중심가로 행진하다가 붙잡혔다.1919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1969년 3월 영암군민들은 회사정 옆에 ‘박규상애국순절비(朴奎相 愛國殉節碑)’를 세워 충절을 기리고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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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1년6월 광주지방법원장흥지청 1919-05-1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출판법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1년 6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6-2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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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남도 영암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구림 삼일운동 기념탑 전라남도 영암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영암 3·1운동 기념비 전라남도 영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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