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4월 10일 영암 장날을 이용하여 박규상(朴奎相)·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정학순(鄭鶴順)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미 3월 11일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본군경에게 누설되어 엄중한 감시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읍내유지 정학순과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는 한편, 군서면 서구림리(郡西面西鳩林里)에 사는 박규상·최한오·조병식과 연락을 취하면서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읍내와 구림리 두곳에서 일제히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본부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군서면 면서기인 김재홍(金在洪)·최민섭(崔旻燮) 두 사람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 50여매, 독립선언서 6백여매, 독립신문 5백여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매를 등사하여 이를 영암 보통학교 학생인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 등에게 배포토록 하였다.
거사일인 4월 10일 오전 9시경 태극기와 유인물을 손에 든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나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중심가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9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53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544·15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군 605·60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9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54·1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