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남도 강진(康津)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오승남(吳承南)·황호경(黃鎬京)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미 황호경 등의 청년 기독교인들과 동경(東京) 유학생인 김안식(金安植)과 함께 3월 25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려고 계획하고 사전 준비하다가, 일제에게 탐지되어 12명의 주동자들이 체포되고, 그는 다행히 은신하였으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아왔다.
그러던 중 배재학교(培材學校) 학생으로서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숨겨가지고 3월 31일 귀향한 오승남을 동리청년들과 함께 만나 서울의 정황을 전해듣고 용기를 얻어,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4월 2일 다시 동지들과 만나, 4월 4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결의하는 한편, 읍내 남포리(南浦里)교회의 강주형(姜宙馨)·박영옥(朴英玉)·김춘석(金春錫) 등을 찾아와 함께 거사할 것을 의논하여 기꺼이 찬동을 얻고, 또 참가를 위하여 미리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려주는 한편, 밤을 새워가면서 태극기 3백여매, 독립선언서 70여매, 독립가(獨立歌) 20여매를 등사하여 두었다.
4월 4일 오전 9시에서 자기 집에 주동자들을 모이게 하여 독립만세 시위방법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준비된 유인물을 각기 분담하여 동성리(東城里) 장터에 갖다 두었다가 거사 신호인 예배당의 정오(正午) 종소리가 울리고, 김후식(金厚植)이 군청 뒤 산마루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자, 동지들이 분담되어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선두에서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이때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강진 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을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합류하여 시위군중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발포로 말미암아 맨손으로 일어난 시위는 중단되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결국 이해 6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5. 21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13·614·615·61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546·15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