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達城郡 公山面 道鶴洞)에 있는 동화사(桐華寺) 부속의 지방학림(地方學林)학생으로 있던 중 권청학(權淸學)과 함께 윤학조(尹學祚)에게서 민족독립을 위해 학생들이 궐기해 줄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따라 3월 28일 심검당( 劍堂)에 모인 학생들에게 발의하고 학생들의 찬성을 얻어 의거일을 3월 30일로 약정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면서 준비를 갖추어 갔다.
3월 29일 9명의 학생들은 준비물을 감추어 대구로 향하였고 그는 거사 당일 가지고 온 백포(白布)로 큰 태극기를 만들어 장대에 달아 들고 학생들과 더불어 남문(南門) 장터로 잠입하였다. 오후 2시가 되자 대구 남문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앞에서 태극기를 높이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군중은 여기에 호응하여 학생들을 선두로 장터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때 그와 함께 9명의 주동자가 모두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해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받고 항고하였으나 이해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과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항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4. 12 大邱地方法院)
- 判決文(1919. 5. 19 大邱覆審法院)
- 判決文(1919. 7. 3 高等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7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60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