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西門)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남성동(南城洞)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이만집은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백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이곳 유지인사들인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서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각자가 주민과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경, 앞서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태련은 남산동 자택에서 등사 기계를 사용하여 선언서 200여 부를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 40여 매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가 진행되었다.
거사 당일인 3월 8일 오후 3시 경, 서문장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계성학교·대구고 등 보통학교·신명여학교·대구성경학교 등 대구지역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때 이만집이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주도자를 비롯한 7, 800여 명의 시위군중들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1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대한 독립기'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일경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 앞 삼각지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4. 18. 大邱地方法院)
- 判決文(1919. 7. 21. 高等法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64∼127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69∼27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47∼354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3·2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