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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942
성명
한자 朴明彦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12~3. 14일간의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3.1운동 만세시위계획에 참가하여 태극기(太極旗)를 만들며 독립선언문을 동리(洞里)에 붙이게 하는 등 활동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1월18일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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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칠곡군 인동면 진평리(仁同面 眞坪里)의 이상백(李相栢)을 중심으로 이영식(李永植)·이내성(李乃成) 등 동지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은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을 찾아와 동지를 모이게 하여 상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는 동리에 독립선언서를 내붙였고 3월 12일 오후 8시 뒷산 마루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사실을 동리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날 오후 8시가 되자 동민들은 뒷산 기슭으로 속속 모여들어 그 수는 300명에 달하였고, 그를 비롯한 주동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밤이 깊도록 만세를 부르다가 급히 출동한 일군경에 의해 주동인물 8명이 검거되고 강제 해산당하였으나, 그후에도 이들의 저항의식은 더욱 높아갔다.

그는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2백 명의 동민과 더불어 뒷산 기슭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2차에 걸친 만세운동으로 그는 많은 주동인물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혔으며 재판에 회부된 인사만도 20명에 달하였다.

그는 이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 (1919. 4. 25 大邱地方法院)
  • 3·1 運動實錄(李龍洛) 20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318∼132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88·389·390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명언 - 경북 칠곡(漆谷) -
본문
1873년 6월 16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47세로, 인동교회(仁同敎會)의 목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전개된 칠곡군 인동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인동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7일, 대구부(大邱府) 신정(新町)에 사는 계성학교(啓聖學校, 현 계성고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인동면 진평동에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영식은 지역 유지이자 인동교회 목사였던 이상백(李相栢)을 방문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인 후, 현재 전국에서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이상백은 자신의 집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독립선언서를 보여 주고 함께 동참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占錫)·임용섭林龍(燮)·권영해(權永海) 등과 함께 회합에 참여하였다.이후 이상백 등 주도자들과 함께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주도자들은 독립선언서 필사, 군중들에게 나눠줄 태극기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등의 임무를 분담하였는데, 허도언(許道彦)과 함께 주민들 사이를 연락하는 역할을 맡았다.거사일인 3월 12일 저녁, 이상백·이영식·이내성李(乃成)을 비롯한 일련의 주동자들은 베껴 쓴 독립선언서를 마을 곳곳에 붙이는 한편,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은밀히 연락하여 참여를 독려하였다.3월 12일 오후 8시, 마을 뒷산 기슭에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상백과 이영식이 번갈아가며 민족자결의 취지를 설명한 후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후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었다.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세시위는 다음 날인 3월 13일에도 이어졌다. 오후 4시 15~16명이, 오후 9시에는 30여 명이 같은 장소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3월 14일에도 오전 10시에 약 4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3일에 걸쳐 만세시위가 연속적으로 일어나자 일제 경찰은 대대적으로 주도자와 적극 가담자 체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사람만 33명에 달하였으며, 이때 동지들과 붙잡혔다.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그 해 6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0월 대구지방법원 1919-04-2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6-1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인동3.12독립만세운동기념탑 경상북도 구미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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