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仁同面眞坪洞)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인동교회의 목사로서 대구(大邱) 서문외(西門外) 시장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3월 7일 이곳에 온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인 이영식(李永植)과 만나 독립선언서 20매를 전해받고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자기의 집에서 이영식·이내성(李乃成)·이범성(李範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占錫)·임용섭(林龍燮)·박명언(朴明彦)·권영해(權永海)·허도언(許道彦) 등과 다시 만나, 3월 12일 오후 8시로 거사일을 정하고 사전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는 권용섭(權龍燮)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로 제작하고, 3월 11일에는 자기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오후 8시, 동리 뒷산기슭에 3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영식과 교대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앞당기기 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이 늦도록 전개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주동자 8명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4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88·389·39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18·1319·13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