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선산(善山) 사람으로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4월 3일 해평면 해평동(海平面海平洞)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해평면 산양동(山陽洞) 기독교회의 목사로 있던 그는, 칠곡군 인동면(漆谷郡仁同面)에 사는 기독교인 박진오(朴鎭五)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오후 11시 30분경, 70여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해평 경찰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공포를 쏘아대며 선산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여, 선산에서 경찰부장 이하 6명, 대구(大邱)의 일본 헌병이 오장 이하 3명, 상주(尙州)의 일본군 수비대 11명이 몰려와 시위군중 55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단 피신하였다가, 5월 8일 경상북도내의 조선인 관공리(官公吏)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한편, 대구시내의 조선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폐점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배포하였다. 6월에는 애국청년을 모집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시키고, 또한 청년 지식인 여러명을 골라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이듬해 7월 상주에서 소위 제령 제 7호(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사기죄로 체포되어 대구로 호송도중 다시 탈주하였다.
일제는 이해 12월 22일 대구복심법원의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징역 8년형을 확정하고 그를 다시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그는 이해 7월, 일본을 거쳐 중국 북경(北京)으로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교민단 대표로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최고 정치회의에 최연소자로 참석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귀국하여 종교와 육영사업에 전념하며 이를 통한 민족 자유사상의 배양 및 실력 양성에 힘쓰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23·37·186·187·188·200·20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2면
- 백은비명(해평면 산양동 소재)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73·274·275·2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448·1449·1450·1451면
- 형사사건부(부산지방검찰청)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56·358·360·4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