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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703
성명
한자 朴仁緖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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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19. 3. 21 경북(慶北) 영주군(榮州郡) 영주(榮州)시장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키려고 계획, 권태중(權泰中)으로 하여금 태극기 15매를 만들게 한 뒤 이날 오후 5시 경 동기(同旗)를 휴대하고 미곡시장으로 달려가서 군중 가운데에서 국기를 휘두르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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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21일 경북 영주군(榮州郡)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소 일제 식민지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직접 보고 돌아와 친분이 두터운 오하근(吳夏根)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봉화군(奉化郡) 상운면(祥雲面) 내림리(內林里)에 살던 그가 영주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한 것은 지리적으로 영주 읍내가 가까웠던 것도 있지만, 영주 읍내의 장이 컸으므로 만세시위를 크게 일으킬 수 있다는 뜻에서 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21일 영주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활동구역을 분담하여 봉화군 일대는 박인서가 맡기로 하고 영주군 일대는 오하근이 맡아 동지 포섭과 만세운동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는 권태중(權泰中)으로 하여금 태극기 15매를 제작케 하는 한편 봉화군 일대의 인사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림으로써 다수의 동지를 포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전 11시를 기해 박인서와 오하근 등은 장터로 나아가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따라 수백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군 헌병은 총검으로 탄압하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했으나, 박인서 등은 굴하지 않고 시위대를 독려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 강행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367·136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인서 - 경북 봉화(奉化) -
본문
1886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상운면(祥雲面) 내림동(內林洞, 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향리(鄕里)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영주군(榮州郡) 영주면(榮州面)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1919년 3월 21일 영주면 만세운동을 오하근(吾夏根)·권태중(權泰中)과 함께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영주군 이산면(伊山面) 증암동(橧岩洞)에 사는 오하근은 딸의 시숙부(媤叔父)로 두 사람은 사돈 관계였다. 당시 23세였던 오하근과 11살 차이가 있었지만, 젊은 오하근이 잘 따랐고 한학도 같이 공부하면서 현실에 대하여 서로 토론하며 평소에도 왕래가 있었다. 권태중도 오하근과 같은 지역에 사는 동년배로서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고종의 인산(因山)을 보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평소 일제의 한국 강점과 식민 통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민족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항상 조국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서울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신문을 통하여 접하고, 가까운 시군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향리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였다. 오하근에게 만세운동이 이웃 지역에서는 일어났지만 영주군에서는 아직 전개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주군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오하근과 결의하게 되었다.영주면은 영주군의 군청소재지가 있는 곳으로 봉화군 상운면과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영주면 장날은 인근에서도 규모가 큰 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에 영주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예정하고,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 제작을 오하근에게 당부하였고, 오하근은 이를 권태중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권태중은 종이로 약 15매의 태극기를 만들어 그들에게 전달하였다.1919년 3월 21일 오하근과 함께 태극기를 몰래 숨기고 장터가 열리는 영주시장으로 향하였다.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적당한 곳을 찾던 중 사람이 많은 곳을 택하였다. 자신은 쌀 시장을 중심으로 하고, 오하근에게는 어물 시장을 중심으로 시위를 전개하도록 하였다. 오후 5시 이들은 각각 쌀 시장과 어물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의 만세 소리에 장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만세시위에 동참하게 되었다.이들의 ‘독립만세’ 선창에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들도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오하근과 함께 모여든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이 급히 파견되어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시키면서 행진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두 사람은 행진을 강행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고, 태극기는 모두 몰수당하였다.이후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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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소 기각 대구복심법원 1919-04-16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5-08 국가기록원
3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2년 대구복심법원 1919-05-08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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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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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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