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21일 경북 영주군(榮州郡)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소 일제 식민지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직접 보고 돌아와 친분이 두터운 오하근(吳夏根)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봉화군(奉化郡) 상운면(祥雲面) 내림리(內林里)에 살던 그가 영주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한 것은 지리적으로 영주 읍내가 가까웠던 것도 있지만, 영주 읍내의 장이 컸으므로 만세시위를 크게 일으킬 수 있다는 뜻에서 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21일 영주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활동구역을 분담하여 봉화군 일대는 박인서가 맡기로 하고 영주군 일대는 오하근이 맡아 동지 포섭과 만세운동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는 권태중(權泰中)으로 하여금 태극기 15매를 제작케 하는 한편 봉화군 일대의 인사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림으로써 다수의 동지를 포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전 11시를 기해 박인서와 오하근 등은 장터로 나아가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따라 수백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군 헌병은 총검으로 탄압하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했으나, 박인서 등은 굴하지 않고 시위대를 독려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 강행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367·13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