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그는 1919년 영덕군(盈德郡) 영덕면에서 수백 명의 군중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덕에서의 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가차 상경했다가 3·1운동을 직접 보고 돌아온 권태원(權泰源)·김세영(金世榮)·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 등이 군내 각처의 기독교 인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추진되었다.
영덕읍에서는 기독교 장로교회 조사 강우근(姜佑根)이 권태원으로부터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직후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 때 기독교도 윤석규 강우근과 함께 영덕면내 화개동·금호동·남정면내 남정동 등지의 기독교도를 대상으로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았으며, 거사일은 읍내 장날인 3월 18일로 정하였다. 또한 윤석규 등은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면서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3월 18일 오후 2시경에 윤석규는 동지 50여 명의 기독교도와 함께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를 시민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만세시위에는 수백 명의 군중이 가담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는데, 일군경의 총검에 의한 무력 탄압으로 해산되었고, 윤석규도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5. 2.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