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통영(統營)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과 4월 2일에 통영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통영 신정(新町)에 있던 한문학당 관란재(觀瀾齋)의 학생으로서 3월 18일 이곳 학생 20명에게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독립기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중앙시장 일대를 시위행진하였다.
곧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엄중한 훈계만 받고 그의 아버지 박태범(朴兌範)에게 인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4월 2일에 통영읍 장날을 이용하여 고채주(高采柱)·강윤조(姜潤祚) 등이 주동한 독립만세운동에 다시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3시 30분경, 부도정(敷島町) 장터에 모인 5천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즉시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다. 그후 1920년 기두옥(金斗玉)에게 군자금 2백원을 주어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전달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통영지회의 간사로 선임되어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270·2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5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38·123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