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11일 하동군 화개면(花開面) 시장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4월 6일 쌍계사( 溪寺) 승려인 김주석(金周錫), 학생 정상근(鄭湘根)·양봉원(梁奉源) 등이 주도하여 일어났다. 그후 이강률·이정수(李汀秀)·이정철(李正哲)·임만규(林萬圭) 등은 이전 거사보다 더 큰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거사일을 다음 장날인 4월 11일로 약정하고 준비를 갖추어 갔다.
그리하여 이강률은 면직원들이 사임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토록 하기 위해 권고문을 작성하였다. '20세기 문명의 목봉(木棒)을 완악(頑惡)한 화개면 직원의 머리에 맹하(猛下)하면서 고(告) 한다. 너희 직원들이여! 오늘날 독립만세 함성이 지진천동(地震天動)하여 요괴은둔(妖怪隱遁)할 수 없고 완추진소(頑醜盡消)하고 야만적 사물을 휘곽쾌소(揮廓快掃)할 것이다. 만세의 함성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체하는 너의 괴물들이여! 추미(醜美)를 진솔(眞率)하여 영향을 반도로부터 영절(永絶)시켜라. 너희들이 만일(萬一) 명완무치(冥頑無恥)하여 아직 차피 왜(此彼倭)의 사무를 폐지하지 않고 유예(猶豫) 결(決)하지 않으면 드디어는 뇌정(雷霆)의 위력을 떨쳐 섬섬(閃閃)한 부월(斧鉞)을 휘둘러 반드시 오살( 殺)할 것이다. 그런고로 후회하지 말라' 라고 기재한 권고문을 4월 10일 밤 면사무소 정문에 붙였다.
이윽고 거사 당일인 4월 11일 정오경, 주도인물들은 화개시장에서 운집한 사람들과 만세시위를 하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강률은 이 일로 이해 6월 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협박 등으로 징역 8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46·124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