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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080
성명
한자 秋鏞滿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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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년 3월 20일 전일의 합천장날을 기하여 시위군중 5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주동자 16명이 검거되었음을 분하게 여겨 이날 다시 마정부락(部落)에 모여 12명의 결사대를 조직한 후 군중에게「최후(最後)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싸워야 합니다」는 호소를 하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경찰서로 몰려가서 전일의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고 외치며 투석으로 맞서 싸울 때 적경(敵警)의 무자비한 발포로 사살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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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 사살(射殺) : 활이나 총 따위로 쏘아 죽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심재기(沈載祺) 외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재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대양면 마정부락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 자리에서 결사대를 조직할 것을 건의하여 김영기(金永琪)·손득룡(孫得龍)·이용선(李龍善)·심맹권(沈孟權)·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등 12명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읍내 광장에서 각 면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오후 7시경 경찰서로 가서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서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경찰서장은 먼저 해산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그는 결사대원과 함께 서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야만적인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서내로 돌진하던 그는, 일본 경찰이 발사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26·327면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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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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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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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합천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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