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09
성명
한자 金永琪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3.20 전일(前日)합천(陜川)장날을 기하여 시위군중 5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주동자 16명이 검거되었음을 분하게 여겨 12명의 결사대를 조직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경찰서로 몰려가서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고 외치며 투석으로 맞서 싸울때 적경(敵警)의 무자비한 발포로 사살(射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 사살(射殺) : 활이나 총 따위로 쏘아 죽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합천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9일의 합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심재기(沈載祺)와 1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에 분개하여 3월 20일 대양면민(大陽面民)들과 함께 재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그는 대양면 마정부락에 모인 시위군중 중에서 심맹권(沈孟權)·손득룡(孫得龍)·이용선(李龍善)·추용만(秋鏞滿)·이상우(李相宇)·배상룡(裵祥龍)외 12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죽음을 같이 할 것을 서약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여기에는 각 면에서 모인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오후 7시,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행진하고, 이어 경찰서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경찰서장과 일본 경찰이 나와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는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서장은 먼저 해산을 하면 석방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내로 몰려들었다.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며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추용만 등 결사대와 함께 도끼와 낫을 들고 서내로 돌진하였다. 이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말미암아,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3·1운동실록(이용락) 670면
  • 제적등본(1919. 3. 20 순국)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2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기 - 경상남도 합천(陜川) 합천군 만세운동
본문
1871년 5월 9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대양면(大陽面) 대목리(大目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합천군 합천면 만세시위를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합천군 합천면의 만세시위는 대양면 주민이 중심이 되었다.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茂谷里) 출신의 강홍렬(姜弘烈)은 고종 인산에 참여해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합천면과 대양면 인사들을 만나 거사를 논의하는데, 3월 19일 합천 장날을 기해 만세를 외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날 오후 4시경 읍내 시장으로 간 강홍렬 등은 군중 500여 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출동한 일본 경찰이 주도 인사 16명을 연행하면서 강제로 해산시켰다.이튿날인 3월 20일 대양면 마정(馬亭) 마을에 모인 주민들은 전날 시위 현장에서 검거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심맹권(沈孟權) 등 12명이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이끌기로 하였는데, 이때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이날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주민을 이끌고 읍내로 들어가자 각 면으로부터 나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군중 앞으로 나가 “나라 잃은 백성은 사람 아닌 닭과 개와 같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거리 곳곳을 행진하다가 오후 7시경 합천경찰서로 몰려가 건물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를 대표해 구금된 인사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서장은 시위대가 먼저 해산하면 구금된 이들을 석방하겠다며 즉각적인 실행을 거절하였다. 격분한 시위대가 경찰서를 향해 투석하고 일본 경찰을 구타하면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하자 실탄을 쏘며 이를 저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호준(金浩俊)·강시만(姜時晩)·추용만(秋鏞滿)과 함께 총에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합천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합천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영기(관리번호:7709)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