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진도(珍島)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영광군(靈光郡) 영광읍에서 보통학교 훈도(訓導)로 재직하였으며 정인영(鄭仁英)·박태엽(朴泰燁) 등과 만나 서울에서의 3·1독립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이곳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10일 영광읍내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는 박태엽과 함께 학교 학생들의 참가를 담당하였고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그후 많은 주동인물이 검거되자 3월 14일에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이날 영광보통학교 학생 120여명을 동원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9일 대구복심법원과 8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6. 9 大邱覆審法院)
- 判決文(1919. 5. 6 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
- 判決文(1919. 8. 8 高等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01·602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