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영광에 내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영광읍에서의 만세운동은 두 갈래의 계통에서 추진되었다. 하나는 서울에 유학하던 조철현·유일(柳一) 등이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한 뒤 선언서를 가지고 3월 5일 고향에 돌아와 읍내 노동조합장 정인영(鄭仁英)과 보통학교 훈도 이병영(李秉英)·박태엽(朴泰燁) 등에게 소식을 알리면서 추진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장(國葬) 참여차 서울에 갔던 읍내 유지 이좌근(李佐根)이 조병현과 조맹환(趙孟煥)·노준(魯俊) 등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된 이들 두 갈래의 인사들은 3월 10일 읍내 장날에 연대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 오후 1시경 독립선언식이 거행될 때, 조철현은 모인 군중들에게 당시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이어 수백 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영광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시위가 해산된 뒤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그는, 재차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3월 14일 영광보통학교 학생 1백 20여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이후 일경의 포위망을 피해 서울로 올라간 그는 영광출신으로 당시 중앙학교(中央學校) 교사로 있던 고경진(高景鎭)과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도를 협의하고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3·1운동 직후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민족대단결에 의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한 항일비밀결사로써, 1919년 10월 경 재차 3·1운동과 같은 거족적 규모의 제2차만세운동을 계획하는 한편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의친왕의 상해 망명 계획이 일경에 사전 발각됨으로써 단원의 대부분이 붙잡혔는데, 이 때 조철현은 서울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대동단 사건' 뿐아니라 영광에서의 '만세운동건' 까지 연루되어 1920년 2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3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9월 21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0. 3. 10. 대구복심법원)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3·1운동실록(이용락) 530∼5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601·60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