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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116
성명
한자 朴東完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8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33(人) 중 1(人), 2년징역형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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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서 수학한 후, 감리교 정동제일교회의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基督敎申報社)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그는 조국 광복의 기운이 고조되던 1919년 2월 중앙 기독교 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찬동하여, 27일에는 이인환(李寅煥)·함태영(咸台永)·박희도·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 등과 함께 정동교회(貞洞敎會) 내에 있는 이필주(李弼柱)의 집에 모여 천도교측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 소년부 위원장·신간회(新幹會) 상임간사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2월,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백만 재만동포들이 중국 관헌들로부터 귀화를 강요당하며 박해받는 일이 벌어지자 각 사회단체의 주요인사들이 상설기관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설립하였는데 선생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 1월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그후 1928년 중반 미주 오아후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 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고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또한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고등경찰요사 22·4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391·402·628·706·710·85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1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1·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52·753·75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92·29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3·147·14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90·566·61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15·29·39·41·43·44·46·50·5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동완 槿谷, 槿谷生, 槿生 경기 양평 3ㆍ1운동, 신간회운동
본문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陽西面) 도곡리(陶谷里)에서 박순형(朴淳馨)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감목관(監牧官)을 역임하였고, 형인 박동원(朴東元)은 1894년 식년생원시(式年生員試)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근곡(槿谷)이고, 필명으로 근곡생(槿谷生), 근생(槿生) 혹은 근(槿)을 사용하기도 했다. 1894년 경 서울로 이주하여 3 · 1운동 당시에는 누하동(樓下洞) 214번지에서 살았다. 5세에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3세에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하였다. 양사동소학교와 관립고등소학교 및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한성외국어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근대교육을 접하면서 기독교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3 · 1운동 당시 북감리교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5년부터 1923년까지 기독신보사의 서기와 주필로 근무하였다. 3 · 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15일과 20일 사이에 기독신보사에서 박희도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3 · 1운동에 관한 분위기를 파악하였고 2월 27일 박희도로부터 3 · 1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은 직후 곧바로 이필주의 집에서 개최된 회합에 참가하였다. 이승훈(李昇薰), 이갑성(李甲成), 함태영(咸台永), 최성모(崔聖模), 김창준(金昌俊)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는 독립선언서의 초안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청원의 초안이 심의되었으며, 참석자들은 문안이 완성되면 서명할 수 있도록 인장(印章)을 함태영에게 맡겼다.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개최되었던 회의에도 참석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3 · 1운동의 거사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꾸는 것과 일정 등이 논의되었다. 재판과정에서는 3 · 1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명확히 피력하였다.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을 합병했다고 하지만, 조선이 독립을 바라고 있다면 일본은 한층 더 나은 동양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 주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립청원서를 미국대통령과 열국(列國)의 대표자들에게 보낸 것에 대해서도 열국의 힘을 빌려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3월 1일의 독립선언을 통해 조선이 이미 독립했음을 알리는 통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더욱이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 재판장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손병희 외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11월 4일 오전 만기 출옥하였다. 1921년 기독교계 출판사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가 설립되고 1923년 7월 『신생명(新生命)』이 출간되자, 기독신보사에서 『신생명』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겨 1925년 8월까지 활동하였다. 『신생명』은 국내에서 주체적인 기독교문화를 만들고자 했던 교계의 인식이 확산되면서 출간된 잡지였다. 그는 『신생명』에 「계급투쟁(階級鬪爭)과 사회진화(社會進化)」(1924년 4월), 「그리스도교의 김화력(感化力)」(1924년 11월), 「그리스도 종교(宗敎)와 우리의 사명(使命)」(1925년 2월) 등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사회성 짙은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또한 1922년 2월 22일부터 1923년 4월 11일까지는 총 17회에 걸쳐 H. V. Dyke의 「The First X-mas Tree」를 『기독신보』에 번역 연재하기도 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와 계급투쟁론(階級鬪爭論)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는데, 자본가와 노동계급이 충돌하는 현실사회에서 자본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불완전한 사회조직을 변경해야하며, 노동계급은 투쟁으로서 파괴만을 주장하지 말고 이타주의(利他主義)와 상애정신(相愛情神)으로 이상적인 새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금전만을 강조하여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물질주의에 기울어지는 배금정신(拜金精神)의 파문이 신성한 그리스도교회에까지 파급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은 ‘불철저한 물질생활에 어리석은 노예가 되지 말고 참생명을 위하여 초월적(超越的) 신생활로 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신생명』에 「인(人)의 세력(勢力)과 성령(聖靈)의 세력」 · 「구약성서(舊約聖書)에 시(視)한 메시아 강림(降臨)의 희망(希望)」 · 「예수의 탄생(誕生)하심」 · 「영혼(靈魂)의 경매(競賣)」 · 「신년(新年)의 조선(朝鮮) 그리스도인」 등의 다양한 글을 기고하였다. 기독교청년회(YMCA)가 주최하는 일요강화(日曜講話)를 통해서도 애국적인 계몽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2년 10월에는 ‘의로운 청년’이라는 제목으로, 1924년 5월에는 ‘우리의 준비’, 1924년 10월에는 ‘우리의 자랑’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4년 3월  『동아일보』의 보도로 촉발된 감리교 감독 웰치(Bishop H. Welch)의 친일발언과 관련하여 그 진상조사를 담당하였다. 이후 사건의 진상에 대해 웰치감독의 실언문제(失言問題)는 다시 문제될 것이 없음은 이미 각 신문을 통해 보도하였으나 웰치의 답변을 게재했던 신문 등을 당국에서 다 압수하여 일반이 확실히 알지 못하고 묻혀 버렸음은 유감이라고 함으로써 사건의 배후에 일제의 의도적 모함이 개재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1925년에는 미국감리교회가 조선에 대한 선교비 지원액의 4할 정도를 삭감하자, 현재 감리교 교단이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지만, ‘만일 우리가 보조를 받고 못 받는 것으로 인해 교회를 문 닫고 전도 사업을 중지한다든지 학교를 폐지하고 교육 사업을 그친다면 무엇으로써 산 신앙이 있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더욱더 선교사업과 교육사업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1926년 2월 3일에는 노백린(盧伯麟)를 위한 추도회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조직되자 안재홍(安在鴻), 김활란(金活蘭), 유각경(兪珏卿), 조병옥(趙炳玉), 정춘수(鄭春洙) 등 기독교계 인물들과 함께 운동에 참여하여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이후 개성지회(開城支會) 창립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경성지회(京城支會) 정기대회에서는 임시집행부의 부의장 및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평양지회(平壤支會) 창립대회에 참가해서는 이관구(李觀求) 등과 함께 본부 대표로서 신간회의 취지에 대해 연설하였으며, 경서지회(京西支會) 설립대회에서는 축사(祝辭)를 하였고 근우회(槿友會) 전국대의원 초청대회에서는 환영사(歡迎辭)를 하는 등 기독교세력을 바탕으로 한 신간회의 조직적 확산과 세력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 12월 9일에는 국내에서 결성된 재만한인옹호동맹(在滿韓人擁護同盟)에 참가하여 곤경에 처한 한인들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재만 한인들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의 만주침략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재만 한인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부당한 박해와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국내외의 민족운동세력들은 이 문제에 대해 커다란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는 안재홍을 위원장으로 홍명희(洪命憙), 김기전(金起田) 등이 참여한 이 동맹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1월 17일 재만 한인에 대한 박해 실태를 직접 조사하기 위해 봉천으로 파견되었다가 약 3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2월 7일에 돌아왔다. 이동원(李圖遠)과 함께 봉천에 도착한 그는 만주조선인대회(滿州朝鮮人大會) 상무위원들과 회견하였으며, 중국의 각 책임 당국과 언론기관을 방문하여 재만 한인 문제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길림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들이 돌아오자 재만동포옹호동맹에서는 1928년 2월 13일 보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본 동맹에서는 재만 한인의 중국으로의 입적(入籍)과 이중국적 해제를 지지한다는 방침 아래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계속해서 동정금을 모금하는 한편, 본 동맹을 지방의 동맹을 구별하기 위해 ‘재만동포옹호동맹중앙부’이라고 개칭하여 전 조선적으로 통일적인 운동을 지속해 나가자고 결의하였다. 한편 기독교계 비밀결사였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핵심인물로도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23일 신흥우(申興雨)의 집에서 조직된 흥업구락부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지회(同志會)의 국내조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이상재(李商在), 신흥우, 구자옥(具滋玉), 유억겸(兪億兼), 이갑성(李甲成), 안재홍(安在鴻), 윤치호(尹致昊), 홍종숙(洪鍾肅), 장두현(張斗鉉) 등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흥업구락부는 신흥우와 유억겸이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이승만에게 흥업구락부의 조직과정을 알렸으며, 민립대학기성운동과 신간회운동 및 YMCA를 통한 기독교농촌운동 등을 통해 조직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1938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 당국이 조선기독교연합회 총무인 구자옥의 가택을 수색하던 중 흥업구락부원 명부 및 그 운동 개황을 기술한 『흥업구락부 일기』를 발견함으로써 흥업구락부의 활동 내용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신흥우, 구자옥, 이관구, 최두선(崔斗善), 홍병덕, 정춘수, 구영숙(具永淑), 박승철(朴勝喆), 박만규(李萬圭) 등 54명의 회원이 체포되어 서대문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 1938년 5월 20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작성한 『연희전문학교 동지회 흥업구락부 관계보고』를 보면 박동완이 중요 회원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후 1920년대 후반에 들어 기독교계 민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신간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고 안재홍이 수감되는 등 민족진영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자 1928년 8월 하와이 지역 한인교회의 목사로 활동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자 국내언론에서는 ‘조선사회의 각 방면에서 활동을 많이 했던 박동완이 다수 동지들의 송별 속에 재류동포의 목사가 되어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미주 하와이 오아후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 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고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내에서 미술과 수예(手藝)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여자예술학교 졸업생들의 수예품이 미국에 수출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으며, 1931년 6월에는 잠시 국내로 들어와 ‘포와재류(布哇在留) 동포의 근황 · ‘인생생활의 삼요소(三要素) ‘포와조선인의 신앙생활’ 등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동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3 · 1운동의 민족대표로서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2월 23일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국내의 가족과 친지들은 그의 유해를 들여와 장례식을 거행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부고조차 낼 수 없었다. 1개월 후 돌아온 유해는 함태영 목사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5월 현재의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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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징역 2년(원판결 취소),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은 각하(却下)함, 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5 인물카드 보안법범 - - - 국사편찬위원회
6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2년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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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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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비석 기미독립선언서 비 경기도 포천시
3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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