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일 강원도 양양군 읍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양양의 3·1운동은 규모나 내용에서 강원도에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4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치러진 4월 4일 양양 장터에서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하여 양양의 3·1운동은 군내 각처로 뻗어 나갔다.
양양 읍내의 만세운동에는 인근의 서면과 손양면에서 농민들이 참가하여 계획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김학구는 서면 상평리(上坪里)에 거주하면서 서면의 주민들과 함께 읍내 시위에 참가한 것이었다. 서면 상평리는 양양읍에서 15리 떨어진 서면의 면소재지였다.
서면의 주민들은 4월 3일 태극기를 제작한 뒤 의병출신의 박춘실(朴春實)의 지도 아래 거사 당일인 4월 4일에 읍내로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읍내에서 합류한 각 면의 시위대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과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군수와 경찰서장을 위협하던 시위대 중 한 명이 일경의 칼에 의해 쓰러지자 무력시위로 돌변하였다. 그리고 저녁부터는 일경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김학구는 일경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613∼616·621·6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