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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244
성명
한자 金鶴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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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19. 4. 4 강원도(江原道) 양양군(襄陽郡) 양양면(襄陽面), 서면(西面), 손양면(巽陽面) 주민들이 공동으로 양양(襄陽)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수 천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현장에서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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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일 강원도 양양군 읍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양양의 3·1운동은 규모나 내용에서 강원도에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4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치러진 4월 4일 양양 장터에서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하여 양양의 3·1운동은 군내 각처로 뻗어 나갔다.

양양 읍내의 만세운동에는 인근의 서면과 손양면에서 농민들이 참가하여 계획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김학구는 서면 상평리(上坪里)에 거주하면서 서면의 주민들과 함께 읍내 시위에 참가한 것이었다. 서면 상평리는 양양읍에서 15리 떨어진 서면의 면소재지였다.

서면의 주민들은 4월 3일 태극기를 제작한 뒤 의병출신의 박춘실(朴春實)의 지도 아래 거사 당일인 4월 4일에 읍내로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읍내에서 합류한 각 면의 시위대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과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군수와 경찰서장을 위협하던 시위대 중 한 명이 일경의 칼에 의해 쓰러지자 무력시위로 돌변하였다. 그리고 저녁부터는 일경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김학구는 일경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613∼616·621·62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학구 - 강원도 양양(襄陽) 양양군 양양면 만세운동
본문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강현면(降峴面) 침교리(砧橋里) 출신이다. 1919년 무렵 양양군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 사는 권성심(權聖心)에게 데릴사위로 가서 살고 있었다. 1919년 양양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되었다.양양면의 만세운동 준비는 유림과 기독교인에 의해 3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유생인 이석범(李錫範)이 3월 3일 서울에서 열린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면서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 왔다. 곧바로 자신이 거주하는 도천면(道川面) 중도문리(中道門里)(현 속초시 도문동)에서 동생인 이국범(李國範)과 아들인 이능렬(李能烈)을 앞세워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또한 양양면 임천리(林泉里)로 건너와 이교완(李敎完)의 집에 머무르면서 만세시위 준비를 추진하였다. 이때 최인식(崔寅植)이 이석범의 취지에 적극 동조하며 시위 준비에 나섰다. 기독교계는 양양감리교회(襄陽監理敎會) 청년부원인 김필선(金弼善)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조영순 전도사의 딸이자 개성 호수돈학교 학생인 조화벽(趙和璧)이 3월말 양양을 찾아와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김필선은 양양보통학교(襄陽普通學校) 8회 졸업생이자 평소 같이 교회를 다니던 친구인 김계호(金啓鎬)·김재구(金在龜)·김규용(金圭容)·김주호(金周鎬)·김봉운(金鳳運)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서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상여 보관처인 곳집에 숨어 들어가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때에 유림계를 중심으로 임천리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시위를 추진하였다.유림계와 기독교계가 연합하여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양양면과 이웃 서면(西面)에서도 마을마다 책임자를 두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3일 군수 이동혁(李東赫)과 군청 관리 심운택(沈雲澤)을 앞세우고 관리와 경찰들이 임천리를 급습하여 이석범 등 22명을 붙잡았다. 태극기 374매도 압수되었다. 하지만 기독교계 최인식·김필선·김재구·김규용·김계호 등은 검거를 피해 거마리(車馬里)에 있는 김종태(金鍾台)의 집에서 밤새 준비하였다.4월 4일은 음력 3월 4일로 양양 장날이었다. 양양면소재지로 들어오는 다섯 군데 길을 따라 장꾼과 함께 시위 군중이 몰려들었다. 양양 장터는 태극기와 만세 소리로 가득 찼고 독립 선언서가 거리마다 뿌려졌다.이때 서면 상평리에서 온 시위대의 한 사람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상평리는 양양면소재지에서 15리 떨어진 서면의 면소재지였다. 의병 출신인 박춘실(朴春實)이 상평리 시위대를 이끌었다. 점심때는 만세 군중이 더욱 불어나 4,000여 명에 달하였다. 오후에 시위 지도부와 경찰이 임천리에서 붙잡힌 22명의 석방 교섭을 하다가 손양면 가평리(柯坪里) 구장 함홍기(咸鴻基)가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난 시위대는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때려 부수었다.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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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양양 3·1운동 기념비 강원도 양양군
2 사당 충렬사 강원도 양양군
3 비석 양양 3·1만세운동 유적비 강원도 양양군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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