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횡성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횡성은 천도교 대교구가 설치된 곳으로 이 곳의 만세운동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3월 27일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날의 만세시위는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천도교측은 4월 1일 장날에 재차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보다 조직적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감리교회 정해경과 같은 교회 횡성청년회 소속 윤태환(尹泰煥)은 함께 거사를 추진하였다.
1919년 4월 1일 횡성 읍내 시장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오후 들어 군중 수가 1,300여 명에 달하였다. 천도교 교구실에는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였고, 시위 군중은 태극기나 몽둥이 등을 들고 관공서 앞 게시판은 물론, 군청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횡성헌병분견소 헌병 고지마[小島]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나자, 최동수(崔東壽)가 헌병을 끌어 내렸다. 이에 군중들이 고지마 헌병을 밟고 때릴 때, 총소리가 울리자, 이후 군중들의 폭력은 멈춰졌다.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고 있다가 오후 5시경 정해경의 선창으로 다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시위 행렬이 헌병분견소를 향해 행진하자, 원주 일본군 보병의 지원을 받은 횡성 군경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부상자는 그 수를 알 수조차 없었다. 다음 날부터 일경은 시위가담자를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정해경은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5. 19)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7. 11)
- 判決文(高等法院:1919. 9. 18)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954~955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576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