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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721
성명
한자 金升泰
이명 金時汝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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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김해군 장유면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가담한 주동자로서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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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김해(金海)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의 장유면 무계리(長有面茂溪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김종훤(金鍾 )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그는 4월 11일 김종훤·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자기 동리사람들의 동원과 태극기의 제작을 책임, 분담하였다.

그는 4월 12일, 그의 동리사람 50여명을 동원하여 그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무계리 장터로 행진하였다. 다른 동리사람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를 시발로 다른 동리에서도 주동자를 선두로 하여 장터에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3천여명이나 되었다. 이때 그는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같은 급보를 받은 일본군경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기에 안감힘을 썼다.

시위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당황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金善五) 등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일시 후퇴했던 그는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과 몽둥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을 때려눕히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김해읍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 군경의 발포로 말미암아 시위대열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는 그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5일 부산(釜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18·219·22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승태 자 : 시여(時汝), 호 : 낙운(洛雲) 경상남도 김해(金海) 3.1운동
본문
1878년 6월 6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장유면(長有面) 내덕리(內德里, 현 김해시 내덕동) 김해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시여(時汝), 호는 낙운(洛雲)이다. 김해 김씨 석성공파(石城公派) 김여해(金麗海)의 6세손으로, 부친은 김규환(金奎煥)이고, 모친은 조순남(趙順男)이다. 1919년 김해군 장유면 만세 시위를 준비해 이끈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김해군 3·1운동은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했던 김종훤(金鐘烜)이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숨겨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김종훤이 찾아와 함께 거사를 일으키자고 제의하므로 흔쾌히 동의하였다. 4월 11일 이강석(李康奭)·최현호(催鉉浩)·조용우(趙鏞宇) 등 지역 인사들과 한자리에 모여 장유면 거사를 논의하였다. 거사 일을 4월 12일 무계리(茂溪里, 현 김해시 무계동) 장날로 정하고, 각자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주민을 규합한 후 무계리 장터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12일 아침 이강석과 함께 내덕리(內德里) 마을을 위·아래 마을로 나눈 후 주민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는데, 아랫마을을 맡아 시위 계획을 알리고 이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다. 12일 오전 10시경 주민들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무계리 장터로 갔다. 이강석 등 주민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시장까지 행진하였다.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김종훤 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이에 호응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무계리 장터 중심가를 행진하다가 헌병주재소까지 갔는데, 일본 헌병이 시위를 제지하며 총을 난사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오후 1시 반경 재집결하였는데, 헌병주재소를 포위한 후 투석하는 등 주재소 건물을 공격하였다. 김해헌병분견소에서 지원병이 도착해 또다시 발포하므로 시위 군중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 서서 저항하던 손명조(孫明祚)·김용이(金用伊)·김선오(金善五) 세 사람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날 현장에서 붙잡혀 김해헌병분견소 유치장에 수용되었다가 4월 14일 부산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6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부산감옥소에서 옥고를 겪은 후 1920년 4월 14일 출소하였다. 모친 조순남 여사가 쓴 내방가사 「자식소회가」는 장유면 무계리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과 체포되어 재판받는 모습, 출소한 이후 일어난 일들을 일부 기록하고 있다. 1940년 2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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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김해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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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기미독립의거 기적비 경상남도 김해시
2 김해 3·1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김해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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