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미원리(米院里) 시장 네거리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미원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이수란을 비롯하여 신경구(申敬求)·이용실(李容實) 등의 주도로 계획되어졌다. 이들은 미원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를 기해 이수란 등은 거사 장소인 미원 장터에 집결하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그런데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헌병이 시위군중이 흔드는 태극기를 빼앗으면서 주동인물인 신경구를 체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 군중은 신경구를 구출하기 위해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가서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군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경은 시위대를 탄압하게 되자 군중들은 투석으로 맞서다가 급기야 주재소의 담장과 유리창, 기물들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3월 31일에도 계속되었고, 4월 1일에는 청원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천도교인 3백여 명이 산위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미원면에서의 항일분위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106∼11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