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충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槐山面) 동부리(東部里)에서 홍명희(洪命熹)와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출옥후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사상 연구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회원으로 또 동아일보 기자로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괴산의 만세운동은 홍명희가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 참례차 상경했다가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고향에 돌아오면서 비롯되었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이재성은 홍명희의 뜻에 찬동하여 만세운동 계획에 참가했다.
이재성은 홍명희를 비롯하여 홍용식(洪用植)·윤명구(尹命求) 등과 함께 3월 19일 괴산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거사 당일에 이재성 등은 운집한 수천 명의 군중에게 준비해 온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한 뒤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그는 만세시위의 선두에 서서 활약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7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0년 출옥한 뒤 중국 방면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의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다가 사회주의 이론에 공감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귀국한 그는 1923년 사회주의 사상연구 단체인 신사상연구회의 창립에 홍명희 등과 함께 참가했으며, 이어 1924년 11월 신사상연구회가 본격적인 사상단체인 화요회(火曜會)로 개편될 때에도 계속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발한 언론활동을 폈는데,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하여 1925년 2월 6일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화요회장으로 치루어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5·5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079·1080면
- 매일신보(1919. 3. 20)
- 동아일보(1925. 2. 8, 2. 10)
-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1979) 제1권 4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25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