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27일 충남 대전에 소재한 음식점 김현태 (金顯泰) 의 집에서 박종호 (朴鍾浩) , 김성현 (金聖鉉) , 김창규 (金昌奎) , 조상연 (曺相連) , 소홍규 (蘇洪奎) 등과 함께 당일 장날을 이용하여 다수의 면민 (面民) 과 함께 태극기 (太極旗) 를 들고 독립선언서 (獨立宣言書) 를 배포하며 만세를 부를 것을 협의하고 동일 하오 3시경 장터로 나가 동지 (同志) 들과 함께 태극기를 군중 (群衆) 에게 나누어 주고 만세를 선창 (先唱) 하여 군중으로 하여금 조선독립만세 (朝鮮獨立萬歲) 를 부르도록 하였고 또 김창규 (金昌奎) 가 소지한 조선독립신문 (朝鮮獨立新聞) , 국민회보 (國民會報) 및 독립선언서 (獨立宣言書) 등을 살포 (撒布) 하며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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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19년 3월 27일 충남 대전(大田)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윤명화는 이날 대전면(大田面) 본정(本町)에 소재한 음식점 김현태(金顯泰) 집에서 박종호(朴鍾浩)·김성현(金聖鉉)·김창규(金昌圭)·조상연(曺相連) 등 동지들과 모여, 당일의 장날을 이용하여 각 상점을 철시(撤市)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협의하였다. 동일 하오 3시경 장터로 나가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또한 윤명화는 김창규가 소지한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국민회보(國民會報),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등을 시위 군중들에게 뿌리며 격려하였다.
이로 인해 윤명화는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刑事事件簿(朝鮮總督府裁判所)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1128~1129면
- 判決文(公州地方法院:1919. 4. 11)
- 每日申報(1919. 3. 31)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97~9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