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3. 24 충남 (忠南) 공주 (公州) 영명학교에서 김관회 (金寬會) 등과 동년 4. 1 공주 장날로 만세시위 거사일자를 정하는 등 사전계획을 협의하다가 피체 되어 무죄를 받은 후, 하와이로 건너가 목사로 재직하면서 1932. 5월 상해 임정 (上海臨政) 후원금을 매달 12원 갹출할 것을 약속하고, 1934. 4. 10 「하와이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 (金九) 주석과 임정 후원에 대해 협의하면서 자신부터 1942. 7월에는 독립자금 5원을 갹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임정 후원에 노력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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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9년 4월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어 갈 때 공주(公州)의 만세시위 운동을 선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공주에 소재한 기독교계 학교인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 김관회(金寬會) 등과 회합을 갖고 4월 1일 장날을 기회로 독립만세 집회를 열 것을 협의하다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붙잡혔다가 1919년 8월 29일 석방되었다. 그 뒤 하와이로 건너가 목사로 재직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1932년 5월 22일 감리교당에 40여 명의 한인이 모여 상해(上海)에서 건너온 현순(玄楯) 목사로부터 윤봉길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의 전말을 소상히 듣고 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을 때, 매년 12원(圓)씩을 출연(出捐)할 것을 약속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1934년 4월에는 원동(遠東)의 특무공작활동을 후원하던 비밀결사로 1932년부터 하와이지방에 조직되어 있던 하와이 애국단(愛國團)에 가입, 단의 사업을 더욱 확장하는데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백범일지(1979) 2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255·256면
- 신한민보(1932. 5. 26, 1942. 7. 23)
-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215·21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137∼1140면